🎼 클래식 역사 — 서양 음악사를 지도 위에서 읽다
바흐가 죽던 해 조선에서는 균역법이 시행됐고, 모차르트가 죽던 해에는 신해통공이 있었으며, 바그너가 자기 극장을 여는 동안 강화도조약이 맺어졌다. 서양 음악의 결정적 순간 열넷을 같은 해의 조선과 나란히 놓는다. 음악 지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게 썼다.The year Bach died, Joseon enacted the Equal Service Law; the year Mozart died, it opened the Seoul markets; while Wagner opened his own theatre, Korea signed the Treaty of Ganghwa. Fourteen decisive moments in Western music, set beside the Korean year that shared them.
소리를 적어두기 시작하다 1025 ~ 1360년대
음악은 원래 적히지 않았다. 외워서 부르는 것이었고, 부르던 사람이 죽으면 같이 사라졌다. 이 장은 소리를 종이에 붙잡아 두는 방법이 만들어지고, 그 방법 덕분에 「작곡가」라는 직업이 생겨나는 300여 년이다.
1025 — 줄 네 개로 소리를 붙잡다
아레초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아드리아 해안의 폼포사 수도원에 성가를 잘 가르치는 수사가 하나 있었다. 그는 성가대원들이 가락을 못 외워 쩔쩔매는 것을 보고, 줄 네 개를 긋고 그 선 위와 사이에 점을 찍어 높낮이를 눈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배우는 속도가 몇 배 빨라졌다.
누구였나 귀도 다레초(991년경~1033년 이후). 베네딕토회 수사이자 교사였다. 남아 있는 그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자부심과 억울함이다. 폼포사에서의 일을 두고 그는 편지에 「질투」라고 적었다.
원문 · 출처 『미크롤로구스』 — 1025년 또는 1026년 저술. 귀도는 편지에서 이 책을 쓸 때 서른네 살이었다고 적었고, 그래서 출생 연도를 991년경으로 본다. 중세를 통틀어 두 번째로 널리 퍼진 음악 저술이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보에티우스의 『음악론』이었다.
쉽게 말하면 악보가 없던 시절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래를 배우려면 아는 사람이 옆에서 불러 줘야 하고, 그 사람이 죽으면 노래도 같이 사라집니다. 귀도의 발명은 「노래를 사람에게서 떼어내는 기술」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이 정거장에는 들을 곡이 없습니다. 귀도는 작곡가가 아니라 기술자였습니다. 대신 그레고리오 성가를 아무거나 한 곡 틀어 놓고 이렇게 들어 보십시오 — 화음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부르는데 전부 같은 가락입니다. 박자표도 없어서 말의 흐름대로 늘어졌다 줄었다 합니다.
가려진 사람 후크발트(840년경~930년). 귀도보다 백여 년 앞서 『화성론』을 썼고, 서양 최초의 본격 음악 이론서로 꼽힌다. 음높이를 문자로 표시하는 방식을 정리했고, 두 가락을 겹치는 방법도 다뤘다. 그러나 그의 체계는 실용적이지 않아 널리 쓰이지 못했다.
그때 조선은 고려 현종 16년. 거란의 2차 침입(1010)과 3차 침입(1018~19),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이 끝난 직후의 복구기였다. 현종 대에 『초조대장경』 조판이 시작된다 — 부처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겠다는 발원이었고, 결과적으로 이쪽도 「기록을 남기는 기술」의 이야기가 된다. 유럽에서 소리를 종이에 옮기는 방법이 만들어지던 그때, 고려에서는 경전을 나무에 새기고 있었다.
적어둘 수 없는 것은 사라져도 되는 것입니까?
1150 — 수녀원장이 쓴 노래
루페르츠베르크 (독일 빙엔 인근)
무슨 일이 있었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소속 수도원에서 독립해 라인강가 루페르츠베르크에 자기 수녀원을 세운다. 남자 수도원장은 반대했다. 딸린 수녀들이 가져온 지참금과, 그들이 끌어들이는 순례자의 헌금이 빠져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는 병으로 드러누웠고, 자기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이 이전을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누구였나 힐데가르트(1098~1179). 귀족 집안의 열 번째 아이로 태어나 여덟 살에 수도원에 봉헌됐다. 어린 시절부터 빛을 보았다고 하며, 마흔둘에 그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여겨 『쉬비아스』를 쓰기 시작했다.
원문 · 출처 「오, 가장 고귀한 푸르름이여」 — 그가 만든 말 비리디타스(viriditas)는 초록빛과 생명력과 촉촉함을 한꺼번에 뜻한다. 라틴어에 없던 용법이다. 이 아틀라스의 「오늘의 필사」에도 그의 문장이 실려 있다.
쉽게 말하면 중세 음악 하면 남자 수도사들의 나직한 성가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힐데가르트의 노래는 꽤 다릅니다. 소리가 위로 크게 뻗고, 한 음절을 수십 개 음으로 길게 늘여 장식합니다.
무엇이 들리나 「오, 가장 고귀한 푸르름이여」나 「덕행의 질서」를 찾아 들어 보십시오. 두 가지가 바로 들립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의 환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갈린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편두통』에서 힐데가르트가 남긴 환시 묘사 — 반짝이는 빛, 시야를 가로지르는 요새 모양의 무늬, 뒤따르는 어둠과 통증 — 가 편두통 전조(aura)의 전형적 기술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이 해석은 널리 인용된다.
가려진 사람 볼미라의 리하르디스. 힐데가르트가 『쉬비아스』를 쓰는 10년 동안 곁에서 받아 적고 정리한 수녀다. 힐데가르트는 그를 각별히 아꼈는데, 리하르디스가 다른 수녀원의 원장으로 가게 되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교황에게까지 편지를 썼으나 막지 못했고, 리하르디스는 떠난 지 1년 만에 죽었다.
그때 조선은 고려 의종 4년 무렵. 문벌귀족 사회의 전성기이자, 20년 뒤 무신정변(1170)이 터지기 직전이다. 의종은 정자와 누각을 짓고 연회를 열었고, 그 자리에 동원된 무신들이 문신에게 받은 모멸이 정변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규범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울 수 있었다면, 그것은 자유입니까 소외입니까?
1360 — 한 사람이 미사 전체를 쓰다
랭스 대성당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기욤 드 마쇼가 「노트르담 미사」를 쓴다. 미사에서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다섯 부분 —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 — 을 한 작곡가가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 쓴 것으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예다. 마쇼는 여기에 「이테, 미사 에스트」(가십시오, 미사가 끝났습니다)까지 붙여 여섯 악장으로 만들었다.
누구였나 마쇼(1300년경~1377)는 음악가이기 전에 시인이었고, 당대에는 시인으로 훨씬 유명했다. 초서가 그를 읽고 배웠다.
원문 · 출처 연대는 확정되지 않았다. 1365년 이전, 대체로 1360년대 초로 본다. 어떤 예배를 위해 쓰였는지, 실제로 연주됐는지도 결론이 나 있지 않다. 마쇼와 그의 형 장이 남긴 유언에 따라 두 사람의 추도 미사로 쓰였다는 견해가 있다.
쉽게 말하면 「한 사람이 전체를 썼다」가 왜 중요한가. 우리가 지금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의 조건이 여기서 갖춰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노트르담 미사」의 키리에를 들어 보십시오. 셋을 느끼실 겁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최초」라는 말이 계속 시비에 걸린다. 투르네 미사가 더 이르지만 악장마다 작곡가가 다르고,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의 작품으로」라는 조건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면 마쇼가 최초인가.
가려진 사람 필리프 드 비트리(1291~1361). 「아르스 노바」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며, 마쇼 세대가 쓴 리듬 표기법의 이론적 토대를 놓았다. 주교였고 왕실 고문이었으며, 당대에는 마쇼보다 지위가 높았다. 페트라르카가 그를 두고 프랑스에 남은 유일한 진짜 시인이라고 썼다.
그때 조선은 고려 공민왕 9년 무렵.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개혁이 진행 중이었고, 홍건적의 침입(1359·1361)으로 왕이 안동까지 피난했다 돌아온 직후다. 5년 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고 토지와 노비 문제에 손을 댄다. 유럽이 흑사병에서 회복하던 시기에 고려는 왜구와 홍건적 사이에 있었다.
여럿이 만든 것과 한 사람이 만든 것 중, 우리는 왜 후자에 더 큰 값을 매깁니까?
극장이 생기다 1607 ~ 1750
음악이 교회 밖으로 나온다. 돈을 내고 들어가 앉아서 듣는 자리가 생기고, 음악가는 성직자가 아니라 고용된 직업인이 된다. 그리고 새 음악이 나올 때마다 「규칙을 어겼다」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1607 — 오페라가 시작되다
만토바 궁정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2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만토바 공작의 궁정에서 초연된다. 관객은 백 명 남짓, 궁정 아카데미 회원들이 모인 작은 방이었다. 오페라라는 형식 자체는 몇 해 앞서 피렌체에서 시도됐지만,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상연되는 가장 이른 작품은 이것이다.
누구였나 몬테베르디(1567~1643)는 크레모나의 이발사 겸 약제사의 아들이었다. 스물셋에 만토바 궁정에 현악기 연주자로 들어갔고, 거기서 20년 넘게 일했다.
원문 · 출처 「음악이 나다 — 나는 감미로운 가락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달랜다.」 오페라 맨 앞에 「음악」이라는 인물이 직접 나와 자기를 소개하는 프롤로그의 첫머리다.
쉽게 말하면 오페라의 발명은 「노래로 연극을 한다」는 발상입니다. 그 전까지 음악은 예배의 일부이거나 춤의 반주였고, 무대 위에서 줄거리를 끌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오르페오」에서 딱 한 대목만 고르라면 3막의 「강력한 영이여」입니다. 오르페우스가 저승의 뱃사공을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1600년, 볼로냐의 이론가 조반니 아르투시가 『현대 음악의 불완전성에 관하여』를 냈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잔인한 아마릴리」 등에서 예를 뽑아 「준비 없는 불협화음」을 조목조목 지적한 책이다. 규칙상 거슬리는 음은 미리 다른 성부에 놓여 있다가 이어져야 하는데 몬테베르디는 그냥 던져 넣는다는 것이었다. 아르투시는 작곡가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고, 가사도 인쇄하지 않았다.
가려진 사람 야코포 페리(1561~1633). 오페라를 실제로 처음 만든 사람이다. 그의 「다프네」가 1598년 피렌체에서 상연됐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첫 오페라다. 그런데 악보가 거의 다 사라졌다. 1600년의 「에우리디체」는 남아 있어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페리의 것이다.
그때 조선은 조선 선조 40년. 임진왜란(1592~98)이 끝난 지 9년, 전후 복구가 한창이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하는 것이 1610년이다. 전쟁으로 흩어진 서적과 의료 체계를 다시 세우던 시기였다.
틀린 전제에서 출발해 새로운 것에 도착했다면, 그 발견은 누구의 공입니까?
1685 —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
아이제나흐 (독일) — 헨델은 같은 해 할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바흐와 헨델이 같은 해에, 서로 150km 남짓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다. 두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헨델이 고향 할레에 들를 때마다 바흐가 만나러 갔으나 번번이 엇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누구였나 바흐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열 살에 아버지를 잃고 형의 집에서 자랐다. 스무 살 무렵 당대 최고의 오르간 주자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들으려고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까지 400km를 걸어갔다. 4주 휴가를 내고 갔다가 넉 달 만에 돌아와 교회 당국에 문책당했다. 스물두 살에는 성가대원과 길에서 시비가 붙어 칼을 뽑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문 · 출처 바흐 1685년 3월 21일 아이제나흐 출생, 헨델 1685년 2월 23일 할레 출생. 당시 독일 개신교 지역은 아직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이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음악가라는 직업의 두 갈래가 보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두 사람의 차이를 한 번에 듣는 방법이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 합창과, 바흐의 「마태 수난곡」 첫 합창을 이어서 들어 보십시오.
아직도 논란인 것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 자신의 자필 악보가 없다. 가장 중요한 사본이 두 번째 아내 안나 막달레나의 필사본이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구자 마틴 자비스가 이 필사본과 다른 증거를 근거로, 이 곡의 실제 작곡자가 안나 막달레나일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필적 분석을 동원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졌다.
가려진 사람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1681~1767). 당대에 바흐보다 훨씬 유명했다. 얼마나 유명했느냐면, 1722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가 악장을 뽑을 때 1순위가 텔레만이었다. 그는 합격하고도 거절했다 — 함부르크가 급료를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선은 조선 숙종 11년.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고 상대를 몰아내는 환국(換局) 정치의 한복판이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했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밀려나며 인현왕후가 폐위된다. 정치적 승패가 곧 목숨의 문제였던 시기다.
월급을 받고 만드는 것과 팔아서 먹고사는 것 — 어느 쪽이 더 자유롭습니까?
1722 — 피타고라스가 남긴 어긋남을 덮다
쾨텐 (독일)
무슨 일이 있었나 바흐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을 완성한다. 스물네 개 조성 전부에 전주곡과 푸가를 하나씩 — 모든 조가 다 쓸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만든 곡집이다.
원문 · 출처 표지의 헌사에 따르면 이 곡집은 「배우려는 젊은이들의 유익과 이미 익숙한 이들의 즐거움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쉽게 말하면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짚어 올라가면 열두 칸 만에 한 옥타브 위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는 정확히 안 맞습니다. 아주 조금 남거나 모자랍니다.
무엇이 들리나 1권의 첫 곡, 다장조 전주곡을 들어 보십시오. 아마 어디선가 들어 보셨을 겁니다 — 구노가 여기에 선율을 얹어 「아베 마리아」를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평균율」이라는 우리말 제목이 오해를 만든다. 원제는 「잘 조율된 클라비어」이고, 이것이 오늘날의 12평균율을 뜻하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 자체가 여러 가능한 조율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는 뜻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때 조선은 조선 경종 2년. 신임사화(1721~22)로 노론이 대거 숙청되던 해다.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둘러싼 싸움이 옥사로 번져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이 죽었다. 2년 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해 탕평을 내건다.
어디에도 완벽하지 않은 대신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쪽을 고른 것 — 이것은 타협입니까 발명입니까?
1750 — 바흐가 죽고, 조선은 균역법을 시행하다
라이프치히 (독일)
무슨 일이 있었나 3월 말, 라이프치히에 영국인 안과의사 존 테일러가 왔다. 눈이 그려진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도착 전에 전단을 뿌리고, 수술 전에 대중 강연을 하는 사람이었다. 국왕 조지 2세의 시의라는 직함이 있었다. 바흐는 그에게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마취는 없었다.
누구였나 죽을 무렵 바흐는 이미 낡은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1737년 한 평론가가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혼란스럽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그 무렵 유행은 가볍고 선율이 또렷한 새 양식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 새 양식을 이끈 사람 중 하나가 그의 둘째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이었다.
원문 · 출처 ★ 완전 동년 일치. 같은 해 조선에서는 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한다. ※ 헨델 수술 건은 1758년 8월 턴브리지웰스에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증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두 장면을 나란히 놓기 위한 자리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바흐를 처음 듣는 분께는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첫 아리아를 권합니다. 3분짜리 느린 곡입니다. 그다음 마지막 30번 변주를 지나 아리아가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80분을 돌아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는데, 같은 곡이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가려진 사람 안나 막달레나 바흐(1701~1760). 결혼 전 궁정 소프라노로 활동했고, 당시 남편이 될 사람보다 많은 급료를 받았다. 결혼 뒤 그는 노래를 그만두고 열세 명을 낳았으며(그중 일곱이 어려서 죽었다), 남편의 악보를 정서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바흐 악보의 상당수가 그의 필적이다.
그때 조선은 영조 26년(1750), 균역법 시행. 양인 남성이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줄였다. 줄어든 재정은 토지 1결당 2말의 결작미, 어세·염세·선박세, 부유층에게 선무군관 직함을 주고 받는 군포로 메웠다. 이듬해 균역청이 설치된다. 백성의 부담을 덜되 재정 구조는 건드리지 않은 절충이었다.
살아서 잊힌 사람의 작업을 80년 뒤에 되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빈으로 모이다 1791 ~ 1824
한 도시에 세 사람이 겹친다. 그중 한 사람은 하인 신분을 걷어차고 시장에서 벌어먹기로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귀가 멀었다. 음악이 주문받아 만드는 물건에서 혼자 써 내려가는 것이 되는 시기다.
1791 — 모차르트가 죽고, 조선은 시장을 열다
빈 (오스트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12월 5일, 모차르트가 서른다섯에 빈에서 죽는다. 사인은 확정되지 않았다 — 급성 류머티즘열, 신부전, 연쇄상구균 감염 등 백 가지가 넘는 가설이 나왔다. 「레퀴엠」은 미완으로 남았고 제자 쥐스마이어가 이어서 완성했다.
누구였나 모차르트는 여섯 살부터 아버지에게 끌려 유럽 궁정을 순회했다. 그 여행은 10년 가까이 이어졌고, 그동안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누나 난네를도 함께 다녔고 신동으로 이름이 났으나, 결혼 적령기가 되자 연주 활동을 접었다.
원문 · 출처 ★ 완전 동년 일치. 같은 해 조선에서는 정조가 신해통공을 시행한다.
쉽게 말하면 「하인 신분을 걷어찼다」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당시 궁정 음악가는 요리사·마부와 같은 등급의 고용인이었고, 식사도 하인 식탁에서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자리가 요리사보다 위, 시종보다 아래였다고 적었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모차르트를 「예쁜 음악」으로만 알고 계셨다면 두 곡을 권합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레퀴엠」 가운데 어디까지가 모차르트인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첫 곡 전체와 이후 여러 곡의 성악 성부, 그리고 라크리모사 여덟 마디까지다. 나머지는 쥐스마이어가 스케치와 구두 지시를 바탕으로 채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지시가 실제로 있었는지, 다른 제자가 먼저 손댔는지를 두고 견해가 갈린다. 20세기 이후 여러 학자가 각자의 보완판을 냈다.
가려진 사람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 그는 빈 궁정 악장이었고, 당대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오페라 작곡가 중 하나였다. 밀라노 라 스칼라 개관작을 썼고, 글루크가 자기 예술적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때 조선은 정조 15년(1791), 신해통공. 채제공의 건의로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해 소상인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용했다. 같은 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운 일로 신해박해가 일어난다. 시장을 열면서 사상은 단속한 해였다.
후원자를 잃고 대중을 얻은 것은 예술가에게 이득이었습니까?
1808 — 네 개의 음으로 시작한 교향곡
안 데어 빈 극장, 빈
무슨 일이 있었나 12월 22일, 베토벤이 자기 작품만으로 채운 연주회를 연다. 교향곡 5번과 6번이 이날 함께 초연됐고, 피아노 협주곡 4번과 합창 환상곡, 미사의 일부까지 올라갔다.
누구였나 1808년의 베토벤은 서른여덟이었고 이미 상당히 듣지 못했다. 6년 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그는 동생들 앞으로 유서를 썼다 — 자기가 죽고 싶었으나 아직 쓰지 못한 작품 때문에 참았다고 적은 문서다. 그는 그 유서를 부치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두었고, 죽은 뒤 발견됐다.
원문 · 출처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유명한 설명은 베토벤의 비서 쉰들러가 전한 것인데, 쉰들러는 베토벤의 대화 수첩을 위조한 것이 후대에 밝혀진 인물이어서 이 증언도 신뢰받지 못한다.
쉽게 말하면 이 곡이 특별한 이유를 음악 용어 없이 말하면 이렇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5번 교향곡을 이미 아신다면 세 가지를 새로 들어 보십시오.
아직도 논란인 것 베토벤이 악보에 적어 넣은 메트로놈 숫자가 지금도 논쟁거리다. 그 숫자대로 연주하면 대부분의 곡이 우리가 익숙한 것보다 눈에 띄게 빠르다. 어떤 대목은 연주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그때 조선은 조선 순조 8년. 정조가 죽고(1800) 열한 살의 순조가 즉위한 뒤, 안동 김씨가 왕실 외척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굳어지던 때다.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다. 정조 대의 개혁 동력이 끊기고 삼정의 문란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재료가 적을수록 오히려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은 음악 바깥에서도 참입니까?
1824 — 듣지 못하는 사람이 쓴 합창
케른트너토어 극장, 빈
무슨 일이 있었나 5월 7일, 교향곡 9번이 초연된다. 교향곡에 사람 목소리를 넣은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고, 가사는 실러의 시 「환희에 부쳐」였다. 베토벤이 이 시를 곡으로 만들고 싶다고 처음 말한 것이 스물두 살 때다. 32년이 걸렸다.
원문 · 출처 이 일화는 당대 여러 증언으로 전하지만 세부는 서로 어긋난다 — 그를 돌려세운 사람이 알토였다는 기록과 소프라노였다는 기록이 함께 있다.
쉽게 말하면 왜 이 장면이 계속 이야기되는가. 「듣지 못하면서 소리를 만든다」는 것이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4악장만 아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곡의 진짜 이상한 대목은 4악장이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 곡은 서로 반대되는 진영이 나란히 자기 것으로 삼아 왔다. 나치 독일은 히틀러 생일 행사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 1972년 유럽평의회는 4악장 선율을 유럽 찬가로 채택했고, 지금은 유럽연합의 상징 음악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번스타인은 가사의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꿔 연주했다. 일본에서는 연말에 시민 합창으로 부르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가려진 사람 미하엘 움라우프. 초연에서 실제로 지휘한 사람이다. 그는 무대 위에 함께 선 베토벤이 박자를 잘못 젓더라도 단원들이 자기만 보도록 미리 조치했고, 그 덕분에 연주가 끝까지 갔다.
그때 조선은 조선 순조 24년. 세도정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 시기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에서 저술을 정리하고 있었다.
감각을 잃고도 그 감각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원래 어디에 있던 것입니까?
음악이 말을 하려 들다 1830 ~ 1913
가사 없는 음악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다 유럽 바깥의 소리를 처음 듣고, 결국 조성이라는 공통 규칙 자체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 장의 인물들은 음악만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 반유대주의, 식민지 박람회, 잊힌 안무가가 함께 온다.
1830 — 줄거리가 있는 교향곡
파리 음악원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2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초연된다. 부제는 「어느 예술가의 생애의 한 삽화」이고, 작곡가가 직접 쓴 줄거리가 딸려 있다 — 짝사랑하는 남자가 아편을 먹고, 환각 속에서 연인을 살해하고 처형당한 뒤 마녀들의 잔치에 끌려간다. 초연 때 이 줄거리를 인쇄해 관객에게 나눠 주었다.
누구였나 베를리오즈(1803~1869)는 시골 의사의 아들이었고, 아버지 뜻에 따라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해부 실습실에 처음 들어간 날 창문으로 뛰쳐나갔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그는 의학을 그만두고 음악원에 들어갔고, 아버지는 송금을 끊었다.
원문 · 출처 베를리오즈는 이 곡의 모델이 된 아일랜드 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을 무대에서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는 만난 적도 없는 그에게 격렬한 편지를 보냈고, 스미스슨은 그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 두 사람은 몇 해 뒤 실제로 결혼했다가 헤어졌다.
쉽게 말하면 「표제음악」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곡에 제목과 줄거리를 붙여, 듣는 사람이 무엇을 상상할지 작곡가가 정해 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5악장 「마녀들의 잔치의 꿈」을 들어 보십시오. 두 대목이 유명합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줄거리를 알고 들어야 하는가. 베를리오즈 자신도 흔들렸다. 초연 때는 줄거리를 인쇄해 나눠 주었지만, 나중에는 콘서트홀에서 연주할 때 배포하지 않아도 된다고 썼다 — 음악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 반대되는 지시를 두 번 남긴 셈이다.
가려진 사람 해리엇 스미스슨(1800~1854). 이 곡의 대상이 된 사람이지만, 곡 어디에도 그의 목소리는 없다.
그때 조선은 조선 순조 30년. 대리청정을 맡아 개혁을 시도하던 효명세자가 스물둘에 죽는다. 그는 3년간 세도 가문을 견제하고 인재를 새로 등용하려 했고, 그가 죽자 안동 김씨의 권력이 다시 굳어졌다. 세도정치를 견제할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을 상상할지 미리 정해 주는 것은 친절입니까, 빼앗는 일입니까?
1876 — 자기 극장을 지은 사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독일)
무슨 일이 있었나 8월 13일, 바그너가 자기 작품만을 위해 지은 극장이 문을 열고 「니벨룽의 반지」 네 편이 13·14·16·17일에 걸쳐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로 상연된다. 전체 약 14시간, 작곡에 26년이 걸렸다. 독일 황제와 브라질 황제가 참석했고 차이콥스키, 그리그, 생상스, 리스트가 왔다. 4천 명이 이 작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누구였나 바그너(1813~1883)는 빚쟁이를 피해 도망 다니며 살았다. 리가에서는 국경을 몰래 넘었고, 런던으로 가는 배에서 폭풍을 만난 경험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되었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해 지명 수배됐고, 12년간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원문 · 출처 ★ 완전 동년 일치. 같은 해 조선에서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된다(2월 27일).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이 이 루트에서 가장 무거운 자리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14시간은 무리입니다. 세 대목만 권합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공개 연주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그의 음악이 수용소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1년 주빈 메타가 텔아비브에서 「트리스탄」 일부를 앙코르로 연주하며 원하는 사람은 나가도 좋다고 했고, 대부분이 남았다. 1992년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 계획은 항의로 취소됐다.
가려진 사람 자코모 마이어베어(1791~1864). 베를린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최고 작곡가가 된 사람이다. 「악마 로베르」와 「위그노 교도」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이 상연된 오페라에 속했다.
그때 조선은 고종 13년(1876) 2월 27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한 일본의 압박 아래 부산·원산·인천이 차례로 열린다.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제1조는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고, 치외법권과 무관세 조항이 붙은 불평등조약이었다. 한국 근대의 기점으로 다뤄진다.
같은 해에 한쪽은 예술의 성전을 짓고 다른 쪽은 문을 열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둘을 같은 「1876년」으로 배웠습니까?
1889 — 유럽이 유럽 밖의 소리를 듣다
파리 만국박람회 (자바관)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만국박람회가 5월 6일부터 11월 6일까지 열린다. 에펠탑이 이때 세워졌다. 스물일곱 살의 드뷔시가 자바관에서 가믈란 연주와 춤을 듣는다.
누구였나 드뷔시(1862~1918)는 도자기 가게를 하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정규 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열 살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열한 해를 다녔다. 재학 중 그는 화성학 시험에서 규칙을 어겨 낮은 점수를 받곤 했다. 교수가 「무슨 규칙을 따르느냐」고 묻자 「내 즐거움」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원문 · 출처 드뷔시는 1895년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바 음악에 비하면 서양의 으뜸음과 딸림음은 유령처럼 보인다고 썼다. 1910년에도 자바의 랩소디가 정해진 형식에 갇히지 않고 무수한 아라베스크의 환상을 따라 전개된다는 취지로 같은 인상을 되풀이해 적었다.
쉽게 말하면 서양 음악은 「긴장 → 해결」로 되어 있습니다. 불안한 화음이 나오면 안정된 화음으로 풀리기를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가 곡을 앞으로 끌고 갑니다. 목적지가 있는 음악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탑」(1903)을 들어 보십시오. 3분 남짓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드뷔시가 가믈란에서 배운 것인가, 가져다 쓴 것인가. 20세기 후반 이후 이 물음이 계속 제기됐다.
가려진 사람 자바관에서 연주한 음악가들. 이름이 남지 않았다.
그때 조선은 고종 26년(1889).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원산항을 통한 콩의 유출을 막는 방곡령을 내렸다. 전해인 1888년의 극심한 흉년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그러나 조일통상장정이 정한 한 달 전 예고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일본의 항의로 배상 문제가 불거졌고, 조병식은 강원도로 전출됐다.
남의 음악에서 배운 것과 남의 음악을 가져다 쓴 것은 어디에서 갈립니까?
1913 — 초연에서 객석이 뒤집히다
샹젤리제 극장, 파리
무슨 일이 있었나 5월 29일,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이 초연되고 객석에서 소동이 벌어진다. 야유와 고함이 음악을 덮어 무용수들이 박자를 들을 수 없었고, 안무가 니진스키가 무대 옆에서 숫자를 외쳐 주었다고 전한다. 지휘자 몽퇴는 끝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누구였나 스트라빈스키(1882~1971)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베이스 가수의 아들이었다. 법학을 공부하다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웠고, 발레 흥행사 디아길레프에게 발탁되어 스물여덟에 「불새」로 파리에서 성공했다. 「봄의 제전」은 그 3년 뒤다.
원문 · 출처 저작권 주의: 스트라빈스키는 1971년에 죽었으므로 이 곡은 아직 보호 기간 중이다. 사실 서술과 역사적 평가는 자유롭게 쓸 수 있으나, 악보와 음원은 사용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이 소동을 「보수적인 관객이 새로운 예술을 못 알아봤다」는 이야기로만 읽으면 절반입니다. 당대 증언들은 야유의 상당 부분이 음악이 아니라 안무를 향한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게다가 샹젤리제 극장은 그해에 막 문을 연 새 극장이었고, 그날 객석에는 화제를 즐기러 온 사교계 인사와 전위를 지지하러 온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양쪽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른 면이 있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두 대목만 아셔도 충분합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폭동」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가 논쟁거리다. 당시 신문 기사와 목격담을 다시 검토한 연구들은, 소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후대에 이야기가 계속 부풀려졌다고 본다. 경찰이 출동했다,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결투 신청이 오갔다는 세부는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서로 어긋난다. 스트라빈스키 본인의 회고도 시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가려진 사람 바츨라프 니진스키(1889~1950). 그날의 안무가다. 음악은 남았고 그의 안무는 사라졌다.
그때 조선은 국권 상실 3년차.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기로, 헌병경찰제가 시행되고 토지조사사업(1910~18)이 진행 중이었다. 이 시기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 이어져, 1911년 서간도에 신흥강습소가 세워졌고 1914년에는 연해주에서 대한광복군정부가 조직된다.
모두가 공유하던 규칙이 사라지면 예술은 자유로워집니까, 서로 통하지 않게 됩니까?
연도와 일화는 모두 확인해 넣었습니다. 마쇼의 미사 연대,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의 출처, 헨델의 수술 기록처럼 학계에서 확정되지 않았거나 신뢰가 낮은 것은 본문에 그렇게 적었습니다. 조선 쪽 설명은 역사아틀라스에 본문이 있고 여기에는 링크만 둡니다. 음원은 넣지 않았습니다 — 작곡은 저작권이 만료됐어도 특정 녹음은 별개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Every date and anecdote here was checked. Where scholarship has not settled a point, or where a story rests on a discredited source, the text says so. The Korean entries link to the History Atlas, where the full text lives. No audio: even when a composition is out of copyright, a particular recording is a separate 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