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
AD 477년경 ~ 524년 · 파비아(이탈리아) — 투옥과 처형의 자리
중세 천 년의 음악 교과서를 쓴 사람 — 정작 그는 연주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의 이탈리아.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밑에서 최고위직(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까지 올랐다가, 반역 혐의로 붙잡혀 파비아에서 처형당했다. 사형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쓴 책이 『철학의 위안』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서유럽에서 급속히 사라지던 때였고, 그는 그리스 학문을 라틴어로 옮겨두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그 번역과 요약이 그리스어가 끊긴 서유럽에서 몇 세기 동안 유일한 통로가 된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음악은 셋이다. 첫째는 세계의 음악, 둘째는 인간의 음악, 셋째는 악기로 이루어지는 음악이다." — 『음악론』 1권
오늘 우리가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셋째뿐이다. 그런데 보에티우스에게 셋째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첫째 「세계의 음악」은 천체의 운행과 계절의 순환이 이루는 비례다 —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둘째 「인간의 음악」은 몸과 영혼이, 이성과 감정이 맞물려 있는 상태다 — 이것도 소리가 아니다. 즉 그에게 음악은 소리의 기술이 아니라 **비례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을 산술·기하·천문과 묶어 사원과(콰드리비움)에 넣었다. 중세 대학에서 음악이 예술이 아니라 수학의 일종으로 가르쳐진 이유가 이것이다.
삶이 만든 철학
그가 쓴 『음악론』은 다섯 권으로 계획됐지만 미완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이 미완의 책이 중세 내내 음악의 표준 교과서였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19세기까지 음악 학위의 지정 도서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수명이 길었다. 아이러니는 이 책이 실제 음악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어떤 악기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음악가」라는 말도 다시 정의했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은 음악가가 아니다. 노래를 짓는 사람도 아니다. **왜 그 소리가 그렇게 들리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음악가다.** 손이 아니라 이성이 음악가를 만든다는 뜻이다. 이 정의는 이후 천 년 동안 연주자보다 이론가를 위에 두는 위계를 만들었고, 르네상스 이후 작곡가와 연주자가 자기 자리를 되찾기까지 오래 걸렸다.
감옥에서 쓴 『철학의 위안』에는 철학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위로한다. 옷자락에 그리스 문자 두 개가 수놓여 있는데, 실천(Π)에서 이론(Θ)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그려져 있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위로 올라가는 그림을 그렸다. 파비아의 산 피에트로 인 치엘 도로 성당에 그의 유해가 있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음악은 소리의 기술인가, 비례에 관한 학문인가?
- 들리지 않는 것도 음악이라 부를 수 있는가?
- 만드는 사람과 판단하는 사람 중 누가 그 분야의 주인인가?
당신이 하는 일에서 "손으로 하는 사람"과 "판단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대접받습니까 — 그것은 정당합니까?
이 사람이 놓인 물음같은 물음 아래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 4개의 질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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