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미술사 —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백남준의 텔레비전까지
정선이 비 갠 인왕산을 그리던 1751년에 유럽은 로코코의 한복판이었고, 김홍도가 씨름판을 그리던 1780년대에 다비드는 아직 혁명을 만나기 전이었다. 울산 바닷가 바위에 새긴 고래에서 시작해 고구려 무덤의 사신, 백제의 향로, 고려의 청자와 수월관음도, 조선의 자화상과 진경산수와 풍속화, 그리고 뉴욕에서 점을 찍던 김환기와 텔레비전을 쌓던 백남준까지 스물한 자리를 지도 위에 놓는다. 정거장마다 그 작품의 「어디를 보면 되는지」와, 그것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적었다.In 1751, when Jeong Seon painted Mount Inwang after rain, Europe was deep in the Rococo; in the 1780s, when Kim Hong-do painted a wrestling match, David had not yet met his revolution. Twenty-one places on a map — whales cut into a rock on the Ulsan coast, the guardian beasts in a Goguryeo tomb, a Baekje incense burner, Goryeo celadon and Water-Moon Avalokiteśvara, Joseon self-portraits and true-view landscapes and scenes of ordinary life, and finally Kim Whanki making dots in New York and Nam June Paik stacking televisions. Each stop says what to look for — and where the work is now.
📖 읽기 전에 — 한국 그림 보는 법 기초📖 Before you begin — how to look at Korean art
서양 그림 앞에서는 「어디를 보나」를 묻게 되는데, 한국 그림 앞에서는 대개 「이게 왜 좋은 건가」를 묻게 됩니다. 재료와 규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만 알고 가면 됩니다.In front of a Western painting people ask where to look; in front of a Korean one they usually ask why it is supposed to be good. The materials and the rules are different. Four things before you start.
① 종이와 비단, 그리고 고칠 수 없다는 것
서양의 유화는 마르기 전에 덧칠하고 긁어내고 고칩니다.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망친 것도 고치고 싶어서였습니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그림은 먹과 물감을 종이나 비단에 스며들게 합니다. 한 번 그은 획은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기 전에 끝나 있어야 하고, 붓이 지나간 속도와 힘이 그대로 남습니다. 「필력」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흔적입니다.
한 가지 더. 그림 안에 여백이 많은 것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비단이나 종이의 흰 바탕 자체가 안개이고 물이고 공기입니다. 서양이 하늘을 파랗게 칠할 때 한국은 하늘을 비워 뒀습니다.
② 그림 위의 글씨 — 화제와 도장
한국과 중국 그림에는 그림 위에 글이 적혀 있습니다. 제목일 때도 있고 시일 때도 있고, 나중에 본 사람이 감상을 적은 것일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화제(畵題)나 제발(題跋)이라 합니다.
서양 사람은 이것을 낙서로 보고 지우고 싶어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글씨와 그림이 같은 붓에서 나온 한 몸입니다. 세한도가 위대한 이유의 절반은 그림 옆에 적힌 김정희의 글에 있습니다.
붉은 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린 사람의 도장, 가진 사람의 도장, 감상한 사람의 도장이 쌓입니다. 도장이 많다는 것은 그 그림이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가 다 적혀 있다는 뜻입니다.
③ 세 종류의 산수 — 관념, 진경, 그리고 그 사이
【관념산수】 실제로 있는 산이 아니라 「산수란 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을 그립니다. 중국 화보(그림 교본)를 보고 배운 형식입니다. 조선 전기 그림 대부분이 이것이고, 몽유도원도의 산도 실제 지형이 아닙니다.
【진경산수】 조선의 실제 산을 그립니다. 18세기 정선이 인왕산과 금강산을 자기 눈으로 보고 그리면서 시작됐습니다. 「우리 것을 우리 눈으로」라는 태도가 그림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 구분을 알고 보면 조선 그림의 절반이 설명됩니다. 다만 진경산수도 사진처럼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정선은 인왕산을 실제보다 훨씬 크고 검게 그렸습니다.
④ 「지금 어디 있나」를 왜 묻는가
이 루트에는 서양 미술사 루트에 없는 층이 하나 있습니다. 작품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짚는 층입니다.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에 있습니다. 고려 불화 160여 점 가운데 130점 넘게가 일본에 있습니다. 강서대묘 사신도는 북한에 있어 사진으로만 봅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댐 물에 1년에 여러 달 잠깁니다.
그린 자리와 놓인 자리가 어긋난 사연이 곧 이 나라의 근현대사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볼 때마다 「지금 어디 있나」를 함께 적었습니다.
① Paper, silk, and the impossibility of correction
Oil paint lets you overpaint, scrape and correct while it is wet; Leonardo ruined the Last Supper precisely because he wanted to correct.
East Asian painting soaks ink and colour into paper or silk. A stroke once made cannot be removed, so the picture must be finished before it is begun, and the speed and pressure of the brush stay visible. “Brush force” is not a metaphor but a physical trace.
And the empty space is not laziness. The bare silk or paper is itself mist, water, air. Where Europe painted the sky blue, Korea left it empty.
② The writing on the picture
Korean and Chinese paintings carry writing on the picture itself — a title, a poem, or a later viewer’s response. This is the inscription, or colophon.
Western eyes read it as graffiti and want it gone, but in East Asia writing and painting come from the same brush and are one thing. Half the greatness of the Sehando lies in the text beside the picture.
The red seals work the same way: the painter’s seal, then the owner’s, then each collector’s. Many seals mean the picture’s whole passage through hands is written on it.
③ Three kinds of landscape
Idealised landscape paints not a real mountain but what a landscape ought to be, learned from Chinese painting manuals. Most early Joseon painting is of this kind; even the mountains of the Dream Journey are not a real place.
True-view landscape paints actual Korean mountains. It begins in the eighteenth century with Jeong Seon looking at Inwang and Geumgang with his own eyes — the moment an attitude, our own land seen with our own eyes, appears in painting.
Knowing the distinction explains half of Joseon painting. But true-view is not photographic either: Jeong Seon made Inwang far larger and blacker than it is.
④ Why we ask where it is now
This route has a layer the Western one does not: where the work is now.
The 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 is in a university library in Japan. Of some 160 surviving Goryeo Buddhist paintings, more than 130 are in Japan. The Gangseo tomb murals are in North Korea and can be seen only in photographs. The Bangudae petroglyphs spend months of each year underwater behind a dam.
The gap between where a thing was made and where it sits is this country’s modern history in miniature. So every stop records it.
바위와 무덤에 그리다 선사 ~ 751
처음에 그림은 걸어 두는 것이 아니었다. 고래를 잡게 해 달라고 바위에 새겼고, 죽은 사람이 무덤 속에서 계속 살라고 벽에 그렸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가장 정성 들여 그린 시대다.
기원전 3500년경 — 바위에 고래를 새기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무슨 일이 있었나 울산 태화강 상류, 높이 4미터 너비 10미터쯤 되는 절벽 바위에 그림 300점 넘게가 새겨져 있다. 고래가 쉰 마리 넘고, 사슴과 호랑이와 멧돼지가 있고, 배 한 척에 사람 스무 명이 타고 있으며, 작살에 꽂힌 고래와 새끼를 업은 고래가 있다. 세계에서 고래잡이를 새긴 바위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세한 축에 든다.
누가 만들었나 이름이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들이 무엇을 알았는가뿐이다.
원문 · 기록 기록이 없다. 이 정거장에는 원문이 없고, 그것이 이 정거장의 성격이다. 문자가 생기기 수천 년 전의 그림이므로 새긴 사람들의 말은 한 마디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바위에 남은 선뿐이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 그림에 잡는 장면이 있고, 새끼 밴 고래가 있고, 사람 얼굴이 있다. 잘 잡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는 그림을 액자에 넣어 벽에 겁니다. 이 그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가 바위, 그것도 그늘이 지고 물이 차오르는 자리에 새겼습니다. 걸어 두고 감상하려던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바라며 새긴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사진이나 탁본을 보실 때 먼저 새끼를 업은 고래를 찾으십시오. 큰 고래 등 위에 작은 고래가 붙어 있습니다. 귀신고래가 실제로 새끼를 등에 업고 헤엄칩니다. 본 사람만 새길 수 있는 장면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제자리에 있다. 그것이 문제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울산 울주군 대곡리 절벽에 그대로 있고, 1965년 완공된 사연댐 때문에 수위가 오르면 잠긴다. 1년에 길게는 여덟 달까지 물속에 있던 해도 있었다. 물에 잠겼다 마르기를 반복하면 바위가 부서진다.
아직도 논란인 것 제작 시기가 확정되지 않았다. 신석기 후기(기원전 3500년경)로 보는 견해와 청동기(기원전 1000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있고, 여러 시기에 걸쳐 덧새겨졌다는 것이 절충적 견해다. 새김 기법의 차이가 시간차의 증거로 쓰이지만 절대연대를 재는 방법이 없다. 바위그림에는 탄소연대측정을 쓸 수 있는 유기물이 없기 때문이다.
가려진 사람 천전리 각석. 반구대에서 2킬로미터 상류에 있는 또 하나의 바위그림이고, 실은 반구대보다 2년 먼저인 1970년에 같은 조사단이 발견했다. 여기에는 동물 대신 마름모와 동심원 같은 기하무늬가 가득하고, 그 옆에 신라 사람들이 새긴 글씨가 800자 넘게 있다. 525년과 539년의 날짜, 왕과 왕비가 다녀갔다는 기록까지 있다.
🖼 반구대 암각화 (신석기~청동기) — 셰일 암벽에 쪼아 새김, 약 4×10m · 국보 제285호 · 울산 울주군 대곡리 (제자리)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아직 아무도 그림을 그려 걸지 않았다. 라스코와 알타미라의 동굴벽화가 1만 5천 년 전이고, 이집트 피라미드가 기원전 2500년경, 그리스 미술이 시작되기까지는 다시 2천 년이 남았다. 이 루트의 서양 짝인 미술사 루트는 이보다 4천 년 뒤 조토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보지 못할 자리에 가장 정성 들여 새긴 사람들은, 누구에게 보이려 한 것인가.
4~5세기 — 무덤 속에서 말을 달리다
지안 (중국 지린성 · 옛 고구려 국내성)
무슨 일이 있었나 압록강 건너 지안(집안)에는 고구려 무덤이 만 기 넘게 남아 있다. 그중 몇십 기의 안쪽 벽에 그림이 있다. 무용총은 그 가운데 하나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본다. 이름은 무덤 벽에 춤추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어서 붙었다.
누가 만들었나 그린 사람의 이름은 없다. 고구려 무덤벽화 중에는 화가의 이름이 적힌 것이 한 점도 없다. 다만 이들이 전문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회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그리는 방식은 속도가 필요하고, 여러 무덤에서 같은 손버릇이 보인다.
원문 · 기록 「고구려 사람들은 걸음이 빠르고 달리기를 잘한다 … 활과 화살과 칼과 창을 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3세기). 중국 쪽 기록이라 편견이 섞여 있지만, 고구려가 기마와 활의 나라였다는 점은 벽화가 그림으로 증언한다. 뒤로 몸을 틀어 쏘는 자세는 유목민의 활쏘기 기술이며, 스키타이와 파르티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이어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의 핵심은 「움직임」입니다. 그때까지 동아시아 그림에서 사람과 동물은 대개 옆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전부 달립니다. 말도 달리고 사슴도 달리고 호랑이도 달립니다.
무엇이 보이나 수렵도에서 먼저 앞선 궁수를 보십시오. 상반신이 180도 가깝게 돌아가 있습니다. 사람 몸으로 가능한 자세인가 싶은데, 실제로 말 위에서 이 자세가 나옵니다.
지금 어디 있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고, 무덤 안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다. 보존을 위해 밀폐했고 연구자도 허가를 받아야 들어간다. 우리가 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사진과 모사도다.
아직도 논란인 것 무용총의 연대가 4세기 말인지 5세기 중엽인지 확정되지 않았다. 무덤 구조와 복식, 벽화 양식으로 추정할 뿐 명문이 없다.
가려진 사람 모사도를 그린 사람들. 1910년대 이후 일본과 조선의 화가들이 무덤 안에 들어가 촛불과 램프 아래서 벽화를 베꼈다. 습기가 차고 산소가 부족한 어둠 속에서 몇 달씩 작업했다. 그 모사도가 없었다면 지금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후 도굴과 훼손으로 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 무용총 수렵도 (4세기 말~5세기 초) — 회벽에 채색 · 중국 지린성 지안 (비공개)
그때 서양은 로마 제국이 둘로 갈라지고(395) 서로마가 무너지기 직전이다. 유럽 미술은 이제 막 기독교 도상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 루트의 서양 짝은 여기서 900년 뒤 조토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열어 보지 않을 무덤 벽에 최고의 화가를 부른 사람들은, 그림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7세기 초 — 네 마리 짐승이 무덤을 지키다
남포 강서 (평안남도)
무슨 일이 있었나 평안남도 강서에 고구려 말기의 무덤 세 기가 있다. 그중 강서대묘의 널방 네 벽에 사신(四神)이 그려져 있다. 동쪽 벽에 청룡, 서쪽 벽에 백호, 남쪽 벽에 주작 한 쌍, 북쪽 벽에 현무. 7세기 초, 고구려가 망하기 몇십 년 전의 그림이다.
누가 만들었나 이름이 없다. 다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대단한 기량이었다는 것은 선 하나로 알 수 있다. 청룡의 몸을 이루는 긴 곡선이 끊김 없이 이어지고 굵기가 리듬 있게 변한다. 돌 위에서 한 번에 그은 선이다.
원문 · 기록 「(보장왕 2년, 643년) 연개소문이 왕에게 아뢰기를, 삼교는 솥의 세 발과 같아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데 지금 유교와 불교는 성하나 도교는 성하지 않으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소서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 무덤이 그려질 무렵 고구려 조정이 도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신도의 배경이 여기 있다.
쉽게 말하면 무덤 벽화가 200년 사이에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보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현무(북쪽 벽)부터 보십시오. 거북과 뱀이 서로 몸을 감고 마주 본다. 뱀의 몸이 거북 등껍질을 두 바퀴 휘감고, 두 머리가 부딪칠 듯 가까이서 마주칩니다. 이 얽힘의 리듬이 사신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부분으로 꼽힙니다.
지금 어디 있나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다. 남한 사람은 갈 수 없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에 포함됐다.
아직도 논란인 것 강서대묘·중묘·소묘 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명문이 없다.
🖼 강서대묘 사신도 (7세기 초) — 화강암 벽에 직접 채색 ·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접근 불가)
그때 서양은 서로마가 무너진 뒤의 유럽은 미술의 암흑기로 불린다. 비잔티움에서 성상화가 그려지고 있었고,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켈스의 서』 같은 채식 필사본을 만들기 시작할 무렵이다.
사람을 지우고 짐승만 남긴 그림은, 무엇을 덜 믿게 되었기에 그렇게 된 것인가.
6~7세기 — 진흙 구덩이에서 나온 향로
부여 능산리 (충청남도)
무슨 일이 있었나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 왕릉 옆의 절터를 발굴하던 중이었다. 겨울이라 발굴을 곧 마쳐야 했고, 그날은 주차장을 만들려던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진흙 구덩이 속에서 금속 덩어리가 나왔다. 물에 잠긴 진흙이 공기를 막아 준 덕에 1400년 동안 녹슬지 않았다.
누가 만들었나 만든 사람의 이름은 없다. 백제의 관영 공방 장인들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기술로 이름난 나라였다. 일본에 절 짓는 기술자와 기와 굽는 기술자와 불상 만드는 기술자를 보냈고, 『일본서기』에 그 이름들이 남아 있다. 아스카 문화의 상당 부분이 백제 장인의 손에서 나왔다.
원문 · 기록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다.」 —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창왕명 석조사리감(567년) 명문. 이 스무 글자가 절의 창건 연대와 성격을 알려 준다. 향로 자체에는 글이 없어서, 이 사리감이 향로의 시대를 재는 자가 된다.
쉽게 말하면 이 향로를 이 루트에 넣는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양 미술사는 그림과 조각으로 서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자기와 금속공예를 빼면 절반이 사라집니다. 이 향로는 그 절반의 첫 자리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맨 위 봉황을 보십시오. 부리 아래 구슬을 물고 있고, 가슴 앞에도 구멍이 있습니다. 연기가 봉황의 가슴에서도 나옵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국보 제287호. 발굴 현장에서 3킬로미터 거리다. 이 향로 하나를 위해 전시실이 따로 있고, 유리 진열장 안에서 360도로 돌려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 향로가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중국에서 온 것인가. 형태의 뿌리는 중국 한나라의 박산향로다. 그러나 중국 박산향로는 대개 훨씬 작고(20~30센티미터) 도식적이며, 봉황과 연꽃과 용을 이렇게 결합한 예가 중국에 없다. 지금은 백제 제작이 정설이다.
가려진 사람 백제 그 자체다. 660년에 멸망하면서 백제의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는 신라 쪽 자료에 기대 쓰였고, 백제 사람이 쓴 역사책은 한 권도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백제는 오랫동안 「부드럽고 우아했다」는 인상만으로 이야기됐다.
🖼 백제 금동대향로 (6세기 후반~7세기 초) — 금동, 높이 61.8cm · 무게 11.8kg · 국립부여박물관 (국보 제287호)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로마가 무너진 뒤의 혼란이 이어지고, 금속공예는 게르만족의 장신구가 중심이었다. 같은 시기 비잔티움에서 성 소피아 대성당(537)이 완성됐다.
쓰기 위해 만든 물건에 세상 전체를 새긴 사람들에게, 쓸모와 아름다움은 갈라지는 것이었는가.
751 — 돌을 쌓아 동굴을 만들다
경주 토함산 (경상북도)
무슨 일이 있었나 751년, 신라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토함산에 절 두 개를 짓기 시작했다. 아래쪽이 불국사, 산 위쪽이 석불사 — 지금 우리가 석굴암이라 부르는 곳이다. 774년 김대성이 죽고 나라가 이어받아 완성했다.
누가 만들었나 김대성(700~774). 신라의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그의 출생 설화가 있다. 가난한 집 아이였던 대성이 어머니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스님에게 시주하고 죽었는데, 그날 재상 김문량의 집에 아이가 태어났고 손에 「대성」이라 쓴 금패를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 기록 「이에 현생의 두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워 신림과 표훈 두 성사를 청하여 각각 살게 하였다.」 —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 일연이 13세기에 적은 것이니 사건에서 500년 뒤의 기록이다. 그러나 석굴암의 창건 사정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쉽게 말하면 석굴암이 대단한 이유를 흔히 「불상이 아름다워서」라고 말하는데, 절반만 맞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건축과 물리학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본존불의 손을 보십시오. 오른손이 무릎 위에 놓여 손가락 끝이 땅을 가리킵니다. 항마촉지인 — 「땅이 내 깨달음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부처가 깨닫던 순간의 자세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제자리에 있다. 경주 토함산, 불국사에서 산길로 3킬로미터. 국보 제24호이자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아직도 논란인 것 1913년 이후의 복원이 옳았는가. 총독부의 해체는 무너질 위험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시멘트 사용이 결과적으로 습기 문제를 만들었다. 1960년대 복원도 원형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앞쪽에 전실을 어떻게 두었는가, 지붕을 어떤 형태로 씌웠는가가 쟁점이다.
가려진 사람 석굴암을 「발견」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907년경 우편배달부가 산길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근거가 약하다. 조선 후기 문헌에도 석굴암을 찾은 기록이 있고 인근 사람들은 계속 알고 있었다.
🖼 석굴암 본존불 (751~774) — 화강암, 불상 높이 3.5m · 경주 토함산 (국보 제24호 · 유네스코 세계유산)
그때 서양은 유럽은 카롤루스 대제 이전의 시기다. 미술은 수도원의 필사본과 성유물함이 중심이었고, 인체를 이만한 크기와 정확도로 조각하는 전통은 로마가 무너진 뒤 끊겨 있었다. 유럽에서 다시 이런 인체 조각이 나오는 것은 700년 뒤 미켈란젤로 무렵이다.
팔 수 없는 돌 앞에서 쌓아 올리기로 한 사람들은, 한계를 넘은 것인가 다른 길을 낸 것인가.
부처를 위해, 사대부를 위해 12세기 ~ 16세기
고려는 부처를 위해 만들었다. 극락을 이 세상에 미리 보여 주려고 흙을 굽고 금가루로 그렸다. 조선이 서면서 주문하는 사람이 바뀐다. 절 대신 궁궐과 사대부의 서재가 그림을 부른다.
12세기 — 푸른 그릇에 무늬를 새겨 넣다
강진 대구면 (전라남도)
무슨 일이 있었나 전라남도 강진 앞바다에 면한 골짜기에 고려의 가마터가 180곳 넘게 남아 있다. 부안 유천리와 함께 고려청자의 양대 산지였고, 여기서 만든 그릇이 배에 실려 개경으로 갔다. 12세기 중엽, 이 가마에서 세계 도자사에 없던 기법이 나왔다.
누가 만들었나 도공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고려의 관영 가마에서 일한 장인들이고, 신분은 낮았다. 조선 후기 기록에도 도공은 천한 직역으로 나온다. 이름 대신 남은 것은 굽 안쪽에 찍힌 관청 표시나 가마 자리에 쌓인 깨진 그릇 더미다. 강진 가마터에는 실패작이 산처럼 쌓여 있다. 열 개를 구워 하나를 얻었다.
원문 · 기록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 한다. 근래 만듦새가 정교해지고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1124). 송나라 사신으로 개경에 한 달 머물며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책이다. 중국 사람이 자기 나라 그릇을 두고 남의 나라 그릇을 칭찬한 기록이라 자주 인용된다.
쉽게 말하면 상감이 왜 대단한지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그릇에 무늬를 그린 것이 아니라 무늬를 그릇 속에 박아 넣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매병을 보실 때 먼저 옆선을 보십시오. 어깨에서 부풀었다가 허리로 좁아지고 굽에서 살짝 벌어집니다. 이 곡선이 고려 매병의 특징입니다. 중국 매병은 어깨가 더 각지고 몸이 곧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대표작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있다. 1935년 간송 전형필이 일본인 수집가에게서 기와집 스무 채 값에 해당하는 2만 원을 주고 사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아직도 논란인 것 상감기법이 어디서 왔는가. 고려가 독자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금속공예의 은상감이나 나전칠기에서 착안했다는 견해가 있고 중국 자주요의 기법과 연결짓는 견해도 있다. 다만 도자기에 이 방식을 본격적으로 쓴 것은 고려뿐이다.
가려진 사람 분청사기.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서면서 청자는 급격히 거칠어진다. 관영 가마 체제가 무너지고 도공들이 지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분청사기다. 회색 흙에 흰 분을 발라 덮고 그 위에 마음대로 무늬를 그렸다.
🖼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12세기 중후반) — 상감청자, 높이 42.1cm · 간송미술관, 서울 (국보 제68호)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고딕 성당이 올라가던 때다. 파리 노트르담이 1163년에 착공했다. 도자기는 아직 유럽에서 만들 수 없었고, 유럽이 자기(磁器)를 굽는 데 성공하는 것은 이보다 600년 뒤 마이센에서다.
나라가 가장 흔들리던 시기에 그릇이 가장 아름다웠다면, 그 아름다움은 무엇의 결과인가.
1310 — 금가루로 그린 관음
개경 (개성)
무슨 일이 있었나 고려 후기, 왕실과 권문세족이 절에 바치려고 불화를 주문했다. 비단에 그리고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무늬를 얹었다. 이 시기 불화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누가 만들었나 그린 사람의 이름이 몇 남았다. 서구방, 김우문, 설충 같은 이름이 화기(畵記)에 적혀 있다. 대부분 궁정의 화원이거나 승려 화가였다.
원문 · 기록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다니며 선지식을 찾다가 보타락가산에 이르러 관자재보살을 뵈었다. 보살은 금강 보석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었다.」 — 『화엄경』 입법계품. 수월관음도는 이 대목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그림의 구도 — 바위 위의 보살, 올려다보는 어린 구도자, 옆의 대나무와 버들가지 — 가 전부 이 경전에서 나왔다.
쉽게 말하면 고려 불화가 대단한 이유는 「얇음」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흰 천의 무늬를 보십시오. 확대해서 보면 작은 원 안에 여섯 잎 꽃이 들어 있습니다. 원의 지름이 1센티미터가 안 됩니다. 이 무늬가 천 전체에 반복되는데, 몸의 굴곡을 따라 원이 타원으로 눌립니다. 무늬가 옷의 입체를 만듭니다.
지금 어디 있나 1310년의 대형 수월관음도는 일본 사가현 가라쓰의 가가미 신사(鏡神社)에 있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지금은 사가현립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다. 한국에서는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대전」에서 한 차례 전시됐다.
아직도 논란인 것 가가미 신사본의 제작 연대와 화기 내용은 후대 기록에 의존한다. 1310년, 숙비 발원, 김우문 등 화원 다섯이라는 정보는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옮겨 적힌 것을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원 화기가 남아 있지 않아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다.
가려진 사람 발원한 여성들. 고려 불화의 화기에는 왕비, 후궁, 귀족 부인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숙비가 그렇고, 1323년 관경변상도를 발원한 것도 여성이다. 이들이 재산을 들여 그림을 주문했고 그래서 그림이 남았다.
🖼 수월관음도 (1310) — 비단에 채색과 금니, 419.5×254.2cm · 가가미 신사, 일본 사가현 (사가현립박물관 보관)
그때 서양은 조토가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를 끝낸 것이 1305년이다. 유럽에서 인물이 무게를 얻고 등을 돌리기 시작하던 바로 그 무렵, 고려는 비단 위에 금가루로 비치는 천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의 130점이 남의 나라에 있는 미술사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1447 — 꿈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1447년 음력 4월 20일 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을 꾸었다. 박팽년과 함께 산속을 헤매다 복사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이르렀다는 꿈이다.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의 무릉도원 이야기 그대로였다.
누가 만들었나 안견(생몰년 미상). 세종 때 도화서 화원으로, 안평대군의 후원을 받았다. 신숙주가 쓴 글에 안평대군이 소장한 중국 그림 220여 점의 목록이 있는데, 안견은 그 그림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15세기 조선에서 중국 회화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었을 것이다.
원문 · 기록 「정묘년(1447) 4월 20일 밤, 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신이 아득해지며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었다 … 박팽년과 함께 한 산 아래 이르니 층층이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다.」 — 안평대군,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 그림 옆에 그가 직접 적은 글이다. 뒷부분에 「안견에게 명하여 그리게 했더니 사흘 만에 완성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 문장이 「사흘」의 근거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에는 서양 그림에 없는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오른쪽 아래에서 시작하십시오. 낮은 산과 나무가 있습니다. 붓질이 부드럽고 색이 옅습니다. 현실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일본 나라현 덴리시, 덴리대학 부속 도서관에 있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다.
아직도 논란인 것 안견이 정말 사흘 만에 그렸는가. 안평대군의 글에 그렇게 적혀 있지만, 발문에 적힌 날짜(1447년 4월 23일)와 그림 완성 시점이 정확히 맞물리는지, 「사흘」이 수사인지를 두고 논의가 있다. 다만 그림의 붓질이 빠르고 거침없다는 점은 이 기록과 어긋나지 않는다.
가려진 사람 강희안(1417~1464). 안견과 같은 시대의 문인 화가로, 집현전 학자이면서 그림을 그렸다. 「고사관수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한다. 바위에 턱을 괴고 물을 바라보는 선비를 그린 작은 그림인데, 붓질이 몇 번 안 되고 배경이 거의 비어 있다.
🖼 몽유도원도 (1447) —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cm (두루마리 전체는 훨씬 길다) · 덴리대학 도서관, 일본 나라현
그때 서양은 피렌체에서 마사초가 「삼위일체」로 벽에 방을 뚫은 지 스무 해,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가 그려진 지 열세 해 뒤다. 유럽이 원근법으로 하나의 시점을 만들고 있을 때, 조선은 여러 시점을 한 두루마리에 이어 붙이고 있었다.
남의 꿈을 듣고 그린 그림이, 꾼 사람의 것인가 그린 사람의 것인가.
1550 — 강아지를 업은 어미 개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조선 전기 그림은 대부분 산수다. 산과 물과 나무를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을 아주 작게 넣는다. 그림은 뜻을 담는 것이지 눈앞의 것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누가 만들었나 이암(1499~?). 왕족이었으나 정치에 나갈 수 없는 자리였다. 조선의 종친은 벼슬을 못 하게 되어 있었다. 할 일이 없는 신분이 그림을 그렸다.
원문 · 기록 「이암은 영모(翎毛)를 잘 그렸는데, 특히 강아지와 고양이를 잘하여 그 자태가 살아 있는 듯하였다.」 — 남태응, 『청죽화사』(18세기 초). 조선 후기의 화가 비평서다. 「영모」는 새와 짐승 그림을 가리킨다. 이암을 다룬 몇 안 되는 조선 쪽 기록이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이 왜 이 루트에 들어가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어미 개의 눈을 보십시오. 반쯤 감겨 있습니다. 졸린 것인지 편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입니다. 이 눈 하나가 그림 전체의 온도를 정합니다.
지금 어디 있나 「모견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상설 전시가 아니라 회화실 교체 전시로 나온다. 종이나 비단 그림은 빛에 약해 몇 달 걸었다 몇 년 쉬는 방식으로 관리한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암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 가운데 진작이 몇 점인지 확정되지 않았다. 서명이나 도장이 있는 것도 후대에 더해진 경우가 있어 양식으로 판단하는데, 조선 전기 비교 자료가 적어 판단이 어렵다.
가려진 사람 신사임당(1504~1551). 이암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고, 풀과 벌레를 그렸다. 수박과 쥐, 가지와 방아깨비, 맨드라미와 개구리. 대상 선택이 이암과 비슷하게 「뜻 없는 것」이다.
🖼 모견도 (어미 개) (16세기 전반) — 종이에 수묵담채, 73.2×42.4cm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그때 서양은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살아 있었고 티치아노가 베네치아에서 그리고 있었다. 브뤼헐이 농민의 결혼식과 아이들의 놀이를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이보다 열몇 해 뒤다. 「뜻 없는 것을 그린다」는 발상이 양쪽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다.
뜻이 없는 그림은 뜻이 있는 그림보다 덜한 것인가.
조선을 조선으로 그리다 1710 ~ 1897
중국 그림책을 보고 배운 산수를 그리던 나라가, 자기 얼굴을 정면으로 그리고 자기 산을 자기 눈으로 그리고 씨름판과 빨래터를 그리기 시작한다. 200년이 걸렸고 그 끝에 술 취한 천재 하나가 서 있다.
1710 — 몸 없는 얼굴이 정면으로 보다
해남 연동 (전라남도)
무슨 일이 있었나 종이 한 장에 얼굴 하나가 있다. 정면을 향하고 있고 눈이 관람자를 똑바로 본다. 수염 한 올 한 올이 그려져 있고, 눈동자에 빛이 맺혀 있다. 그런데 목이 없고 어깨가 없다. 얼굴만 종이 위에 떠 있다.
누가 만들었나 윤두서(1668~1715). 해남 윤씨 집안 사람으로,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남인 집안이었고, 그가 살던 시기는 남인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때였다. 스물여섯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원문 · 기록 「그의 자화상을 보면 수염과 눈썹이 실낱같이 세밀하고 정신이 살아 있어, 보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낀다.」 — 후대 문인들의 평으로 여러 문집에 비슷한 표현이 전한다. 정작 윤두서 자신은 이 그림에 대해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다. 서명도 도장도 없다. 그림에 대한 화가의 침묵이 이 그림의 성격을 보여 준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이 왜 특별한지는 서양 자화상과 비교하면 선명합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눈을 보십시오. 눈동자 안에 흰 점이 찍혀 있습니다. 빛이 반사된 자리입니다. 그리고 눈이 정확히 정면을 봅니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눈이 따라옵니다.
지금 어디 있나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전남 해남군 연동리)에 전해 오다가, 지금은 보존을 위해 해남 녹우당 유물전시관과 국립광주박물관을 오가며 관리된다. 국보 제240호다.
아직도 논란인 것 몸이 원래 없었는가.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얼굴만 그렸다」는 해석이 유력했고, 그 해석 위에 「존재의 응시」 같은 미학적 평가가 쌓였다. 2006년 조사로 상체 선이 확인되면서 그 해석의 근거가 흔들렸다.
가려진 사람 윤두서의 풍속화. 「나물 캐는 여인」과 「짚신 삼는 사람」은 조선 풍속화의 시작으로 꼽히는데, 자화상의 명성에 가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다.
🖼 자화상 (1710년경) — 종이에 담채, 38.5×20.5cm · 녹우당, 해남 (국보 제240호)
그때 서양은 유럽은 로코코의 시작 무렵이다. 렘브란트가 죽은 지 40년, 그가 남긴 자화상 80여 점이 이미 있었다. 서양에서 자화상은 흔한 장르였고 조선에서는 사건이었다.
벼슬길이 막힌 사람이 자기 얼굴을 정면으로 그렸다면, 그는 무엇을 확인하려 한 것인가.
1751 — 비 갠 인왕산을 검게 칠하다
한양 인왕산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1751년 윤5월 하순, 서울에 여러 날 비가 왔다. 비가 그치자 일흔여섯 살의 정선이 인왕산을 그렸다. 그림 왼쪽에 「인왕제색(仁王霽色)」과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이라 적었다. 신미년 윤달 하순, 곧 1751년 양력 6월 말이다.
누가 만들었나 정선(1676~1759). 호는 겸재.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했고, 서른 무렵 도화서에 들어간 것으로 본다. 여든넷까지 살면서 엄청난 양을 그렸다. 남은 작품이 400점이 넘는다.
원문 · 기록 「인왕제색. 신미년 윤달 하순.」 — 그림 왼쪽 위에 정선이 직접 쓴 화제. 「제색(霽色)」은 비가 갠 뒤의 빛깔이라는 뜻이다. 제목이 산의 이름이 아니라 「비 갠 뒤의 빛」이다. 무엇을 그렸는가에 대한 화가 자신의 답이 제목에 있다.
쉽게 말하면 진경산수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말하면 「우리 산을 우리 눈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검은 바위 덩어리를 보십시오. 붓을 옆으로 뉘어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린 자국이 보입니다. 이것을 「부벽준」이라 하는데, 정선은 이것을 아주 크고 거칠게 썼습니다. 붓 자국 하나가 손바닥만 합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보 제216호.
아직도 논란인 것 그림 속 기와집이 이병연의 집인가. 이 해석은 1970년대 이후 널리 퍼졌고 「죽어 가는 벗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이야기로 굳었다. 그러나 근거는 정황뿐이다. 이병연이 나흘 뒤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선이 그를 위해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집의 위치가 이병연의 집터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가려진 사람 이병연(1671~1751). 시인이고 정선의 평생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울 북악산 아래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정선이 그림을 그리면 이병연이 시를 붙이는 방식으로 평생 함께 작업했다. 「경교명승첩」은 두 사람이 그림과 시를 주고받은 화첩이다.
🖼 인왕제색도 (1751) — 종이에 수묵, 79.2×138.2cm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국보 제216호)
그때 서양은 유럽은 로코코의 한복판이다. 프랑수아 부셰가 궁정의 목가적 풍경을 그리고 있었고, 카날레토가 베네치아 풍경을 정밀하게 그려 영국 관광객에게 팔던 때다. 실제 장소를 그린다는 점에서 진경산수와 통하지만, 카날레토는 광학 장치를 써서 정확히 그렸고 정선은 산을 실제보다 검게 그렸다.
실제보다 검게 그린 산이 실제 산보다 그 산에 가깝다면, 「사실」이란 무엇인가.
1785 — 씨름판을 위에서 내려다보다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종이 한 장에 스물두 명이 있다. 가운데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씨름을 하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오른쪽 위에 엿장수가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누가 만들었나 김홍도(1745~1806년 이후). 호는 단원. 중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강세황에게 배웠다. 강세황이 그를 도화서에 추천했고, 스물아홉에 영조의 어진(초상)을 그리는 일에 참여했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는 정조의 어진도 그렸다. 왕이 그를 아꼈다.
원문 · 기록 「김홍도는 못 그리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부처, 꽃과 과일, 새와 짐승, 벌레와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에 들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 장기를 발휘하였다.」 — 강세황, 「단원기(檀園記)」(1784). 스승이 제자에 대해 쓴 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표현이 이 그림첩의 성격을 정확히 짚는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을 보실 때 사람 수를 세어 보십시오. 스물두 명입니다. 그리고 그중 아무도 같은 자세가 아닙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씨름하는 두 사람을 보십시오. 오른쪽 사람이 왼쪽 사람을 들어 올리고 있고, 왼쪽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집니다. 표정과 몸의 기울기로 결과를 알려 줍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단원 풍속도첩」 스물다섯 장 중 한 장이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림 속 거꾸로 그린 손이 실수인가 의도인가. 실수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일부러 남긴 것」이라거나 「후대의 보수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가려진 사람 김득신(1754~1822)과 신한평. 김홍도와 같은 시대의 도화서 화원들이다. 김득신의 「파적도」는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자 주인이 마루에서 몸을 던지며 담뱃대를 휘두르는 장면인데, 순간 포착의 재미로는 김홍도에 뒤지지 않는다.
🖼 씨름 (단원 풍속도첩) (18세기 후반) — 종이에 수묵담채, 27×22.7cm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보물 제527호)
그때 서양은 파리에서는 다비드가 아직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를 막 내놓았고 혁명은 4년 뒤다. 유럽 미술이 아직 왕과 신화를 그리던 때에, 조선의 궁정화가는 씨름판과 대장간을 그리고 있었다.
왕의 화가가 씨름판을 그렸을 때, 그것은 백성을 향한 애정인가 태평성대의 증명인가.
1805 — 초승달 아래 두 사람이 서 있다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밤이다. 담벼락 모퉁이에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고 손에 등롱을 들었다. 여자는 쓰개치마를 머리에 쓰고 얼굴을 반쯤 가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누가 만들었나 신윤복(1758~1814년 이후). 호는 혜원.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 화원이었고, 그도 화원이 됐다. 그런데 생애 기록이 거의 없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화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축에 드는데 전기가 비어 있다.
원문 · 기록 「달빛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 그림 왼쪽에 신윤복이 적은 화제. 삼경은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다. 이 두 줄이 그림의 전부를 설명한다.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고, 「두 사람만 안다」고만 적었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의 핵심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달을 보십시오. 초승달인데 아래로 향해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이 이 모양을 근거로 「1793년 8월 21일 부분월식」이라고 추정한 연구가 있습니다. 다만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어디 있나 간송미술관에 있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서른 장 가운데 한 장이다.
아직도 논란인 것 달의 모양이 월식인가. 1793년 8월 21일 부분월식이라는 천문학적 추정이 2000년대에 제기되어 널리 인용되지만, 신윤복이 그 밤을 그렸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화가가 분위기를 위해 달 모양을 바꿨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가려진 사람 그림 속 여자들. 신윤복의 그림에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계속 나온다. 그네를 타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하고, 술자리에서 악기를 켜고, 밤에 남자를 만난다. 조선 회화에서 여성이 이렇게 많이, 이렇게 크게 나오는 화첩이 달리 없다.
🖼 월하정인 (달 아래 연인) (19세기 초) — 종이에 채색, 28.2×35.6cm · 간송미술관, 서울 (국보 제135호)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직후다. 다비드가 대관식을 그리고 고야가 마드리드에서 궁정화가로 일하던 때다. 고야가 총살당하는 사람을 그리기까지 9년이 남았다.
설명하지 않는 그림과 설명하는 그림 가운데, 어느 쪽이 보는 사람을 더 존중하는가.
1844 — 유배지에서 그린 마른 나무 네 그루
제주 대정 (유배지)
무슨 일이 있었나 1840년 김정희는 쉰다섯에 제주로 유배됐다. 가시 울타리를 둘러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위리안치였다. 아내는 유배 2년 뒤에 죽었고, 그는 그 소식을 한 달 뒤에 들었다.
누가 만들었나 김정희(1786~1856). 호는 추사.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다. 스물넷에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완원과 옹방강 같은 대학자를 만났고, 그들과 평생 편지를 주고받았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판독해 그것이 진흥왕의 비임을 밝힌 것도 그다.
원문 · 기록 「지난해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책을 부쳐 왔고, 올해에는 황조경세문편을 보내 왔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 시들지 않는 것이어서, 추워지기 전에도 소나무 잣나무요 추워진 뒤에도 소나무 잣나무다.」 — 김정희, 「세한도 발문」(1844). 그림보다 이 글이 길다. 그리고 이 글이 그림을 완성한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을 처음 보면 실망하는 분이 많습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은 삐뚤고 창문은 동그란 구멍 하나뿐이며 나무는 앙상합니다. 색도 없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집을 보십시오. 지붕과 벽이 곧은 선 몇 개로 되어 있고, 창문은 동그란 구멍입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도 없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보 제180호.
아직도 논란인 것 그림 속 집과 나무가 실제 제주의 풍경인가. 제주에는 이런 소나무 숲이 없고 집도 제주 가옥과 다르다. 관념적으로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추운 날의 절개」라는 관념을 그린 것이지 유배지를 그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려진 사람 이상적(1804~1865). 이 그림을 받은 사람이다. 역관이었고, 열두 번 청나라에 다녀왔다. 중인 신분이라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 세한도 (1844) — 종이에 수묵, 23.9×69.2cm (두루마리 전체는 훨씬 길다)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국보 제180호)
그때 서양은 파리에서는 쿠르베가 아직 무명이고 들라크루아가 활동하던 때다. 유럽 회화가 크기와 색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조선에서는 종이 한 장에 마른 붓으로 나무 네 그루를 그린 그림이 최고의 작품으로 남았다.
잘 그리지 않은 그림이 최고의 그림이 될 수 있다면,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1897 — 취해서 그린 마지막 붓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장승업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서 자랐다. 글을 배우지 못해 평생 읽고 쓰지 못했다. 주인집 아이들이 그림 공부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붓을 잡았는데, 처음부터 잘 그렸다고 전한다.
누가 만들었나 장승업(1843~1897년경). 호는 오원(吾園). 이 호에 그의 성격이 있다. 조선 후기 화단에서 이름난 사람이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인데, 그가 「나도 원(園)이다」라는 뜻으로 오원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자기를 그 두 사람 옆에 세운 것이다.
원문 · 기록 「술을 좋아하여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갔고, 취하면 곧 붓을 들었다. 취하지 않으면 그리지 않았다.」 — 장승업에 관해 전하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구전과 후대 기록이 섞여 있다. 정작 그 자신이 남긴 글은 한 줄도 없다. 글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림 위의 화제는 다른 사람이 대신 써 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을 3장의 마지막에 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그의 그림을 보실 때는 먼저 붓의 속도를 보십시오. 획이 빠릅니다. 망설인 자국이 없습니다. 나뭇가지 하나가 한 번에 그어집니다.
지금 어디 있나 그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간송미술관, 서울대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다. 「호취도」, 「삼인문년도」, 「기명절지도」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의 생애 이야기 대부분이 후대의 것이다. 고아였다는 것, 글을 몰랐다는 것, 궁궐에서 세 번 도망쳤다는 것 모두 당대 문서가 아니라 20세기 초에 정리된 이야기다. 특히 궁궐 탈출담은 극적으로 각색된 흔적이 있다.
가려진 사람 안중식(1861~1919)과 조석진(1853~1920). 장승업의 제자들이다. 두 사람은 스승이 죽은 뒤 1911년 서화미술회를 세워 학생을 가르쳤다. 이상범, 노수현, 김은호, 변관식이 여기서 나왔다. 20세기 한국화의 뼈대가 이 교실에서 만들어졌다.
🖼 호취도 (매) (19세기 후반) — 종이에 수묵담채 · 삼성미술관 리움 외
그때 서양은 파리에서는 인상파 전시회가 끝나고 세잔이 엑스에서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기 시작하던 때다. 고흐는 이미 죽었고(1890), 피카소는 열여섯 살이었다. 유럽이 회화의 규칙을 부수기 시작할 때, 조선의 마지막 화가는 붓 하나로 옛 전통의 끝을 지키고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한 사람이 한 시대의 마지막 대가가 되었다면, 그 시대의 교양이란 무엇이었는가.
붓을 놓고 유화를 들다 1915 ~ 1974
1915년 한 사람이 도쿄에서 서양화를 배워 돌아온다. 나라는 이미 없었다. 그 뒤 60년, 화가들은 남의 나라 재료로 자기 것을 말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소로, 화강암 같은 질감으로, 점 하나로, 그리고 텔레비전으로.
1915 — 유화를 배워 돌아왔더니 나라가 없었다
경성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1909년, 스물세 살의 고희동이 도쿄로 떠났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간 첫 조선인이다. 그가 배우러 간 것은 유화였다. 캔버스에 기름으로 그리는 방식, 조선에 없던 재료와 방법이다.
누가 만들었나 고희동(1886~1965).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관립학교를 나와 궁내부에서 일했다. 처음 그림은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배웠다. 장승업의 제자들이다. 그러니 그는 조선 화단의 끝자락에서 배워 서양화의 처음이 된 사람이다.
원문 · 기록 「서양화를 배우겠다고 하니 집안에서는 환쟁이가 된다고 반대가 심하였다.」 — 고희동이 뒷날 회고한 말로 여러 글에 인용된다. 조선에서 화가는 중인 이하의 직업이었다. 양반 집안의 아들이 그림을 배우겠다는 것은 신분을 버리겠다는 말과 같았다. 조선의 마지막 세대가 근대 미술로 넘어갈 때 넘어야 했던 벽이 이 한 문장에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이 4장의 첫 자리인 이유는 「재료가 바뀐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그의 「자화상」(1915)을 보실 때, 먼저 옷을 보십시오. 흰 두루마기를 입고 부채를 들고 있습니다. 유화로 그린 조선 옷입니다. 재료는 서양이고 입은 것은 조선입니다. 이 그림 한 장에 그가 놓인 자리가 다 있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그의 유화 세 점 가운데 「자화상」(1915)과 「부채를 든 자화상」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 도쿄예술대학(옛 도쿄미술학교)이 졸업 작품으로 보관하던 것을 2000년대에 확인해 한국에 소개했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첫 조선인인 것은 맞다. 다만 그보다 앞서 유화를 접하거나 그린 조선인이 없었는가는 다른 문제다. 개항 이후 선교사와 외국인을 통해 유화를 본 사람들이 있었고, 원산과 인천에서 서양식 그림을 그린 사례가 보고된다. 「최초」라는 말은 늘 조심해서 써야 한다.
가려진 사람 김관호(1890~1959). 고희동에 이어 두 번째로 도쿄미술학교에 들어간 조선인이고, 1916년 졸업 작품 「해질녘」으로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조선인이 일본 관전에서 상을 받은 첫 사례였다.
🖼 자화상 (1915) — 캔버스에 유채 · 국립현대미술관
그때 서양은 유럽은 1차 세계대전 중이다. 파리에서는 이미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 그려졌고, 2년 뒤 뒤샹이 뉴욕에 변기를 낸다. 서양이 회화의 규칙을 부수고 있을 때, 조선 유학생은 그 규칙을 처음 배우고 있었다.
남의 나라 재료로 자기 것을 그리려 할 때, 먼저 바뀌는 것은 그림인가 그리는 사람인가.
1928 —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경성 (서울) · 파리
무슨 일이 있었나 나혜석은 1913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다. 유학 시절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다. 잡지에 글을 쓰고, 조선인 유학생 운동에 참여하고, 여성의 처지를 논했다.
누가 만들었나 나혜석(1896~1948).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화가이면서 소설가이고 시인이고 논객이었다. 1918년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소설로 꼽힌다.
원문 · 기록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 않는 위안물과 흥신물을 원하는가.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자만자족의 형태로 완전히 물체가 되고 말 것이라.」 — 나혜석, 「이혼고백장」(『삼천리』, 1934). 자기 이혼을 공개하고 사회를 비판한 이 글로 그는 완전히 매장됐다. 90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은 한국 여성사의 첫 문헌 가운데 하나로 읽힌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그림보다 사람의 이야기가 큽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그림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남은 그림 가운데 「자화상」(1928년경 추정)을 보십시오. 어두운 배경에 여자가 정면을 보고 있습니다. 눈이 크고 표정이 굳어 있습니다. 파리 시기에 그린 것으로 보는데,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현대미술관과 수원시립미술관에 몇 점 있다. 수원은 그의 고향이고, 수원시립미술관은 그의 이름을 딴 전시 공간과 상설 코너를 두고 있다. 수원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 가운데 진작이 몇 점인지 확정되지 않았다. 「자화상」도 제작 시기와 진위를 두고 논의가 있다.
가려진 사람 백남순(1904~1994)과 이갑향. 나혜석 다음 세대의 여성 서양화가들이다. 백남순은 1920년대에 파리로 유학해 그림을 배웠고, 조선 여성으로 파리에서 공부한 두 번째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낙원」 한 점만 확인된다.
🖼 자화상 (1928년경 (추정)) — 캔버스에 유채 · 수원시립미술관
그때 서양은 파리는 전간기의 몽파르나스 시대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활동 중이었고, 여성 화가로는 타마라 드 렘피카가 파리에서 이름을 얻고 있었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문 것이 바로 그 시기다.
작품이 남지 않은 화가를 미술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1954 —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사람
부산 · 통영 · 서귀포
무슨 일이 있었나 이중섭은 1950년 12월 원산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과 함께였다. 부산, 제주 서귀포, 통영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서귀포에서 산 방은 한 평 반이었다. 네 식구가 그 방에서 겨울을 났다.
누가 만들었나 이중섭(1916~1956).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서 미술교사 임용련에게 배웠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문화학원에서 공부했다. 재학 중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했고, 1945년 원산에서 결혼했다. 마사코는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그와 결혼했다.
원문 · 기록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 나만의 아름다운 남덕. 하루 종일 그대 생각뿐이오 … 아고리(그가 자기를 부르던 이름)는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그대와 아이들 앞에 갈 것이오.」 —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남덕(南德)」은 마사코의 한국 이름이다. 편지 여백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의 편지는 지금 미술 작품으로 전시된다.
쉽게 말하면 이중섭의 소가 왜 그렇게 유명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이미지를 실을 수 없어 말로 짚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고, 제주 서귀포에 이중섭미술관이 있다. 서귀포 미술관 옆에는 그가 살던 한 평 반짜리 방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들어가 보면 얼마나 좁은지 몸으로 알게 된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죽었다는 것이 의학적 사실이지만, 「먹기를 거부했다」는 증언이 있어 사실상의 자기 파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정신과 진단 기록도 남아 있다.
가려진 사람 야마모토 마사코(1921~2022). 이중섭의 아내다. 일본 부유한 집안의 딸로, 1945년 전쟁 막바지에 혼자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원산에서 결혼했다. 한국 이름은 남덕이다.
🖼 흰 소 (1954년경) — 합판에 유채 · 국립현대미술관 · 제주 이중섭미술관 외
그때 서양은 뉴욕에서는 잭슨 폴록이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물감을 뿌리던 시기가 막 지났고, 추상표현주의가 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고 있었다. 같은 시기 한국의 화가는 담뱃갑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새기고 있었다.
재료가 없어서 만든 방법이 미술사에 남았다면, 가난은 그의 그림에 무엇을 했는가.
1954 — 화강암처럼 그린 사람들
서울 창신동
무슨 일이 있었나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마쳤다. 집이 기울어 더 배우지 못했다. 열두 살에 밀레의 「만종」을 인쇄물로 보고 화가가 되기로 했다고 전한다.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누가 만들었나 박수근(1914~1965).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대신 조선미술전람회에 계속 응모해 열여덟 살에 입선했다. 그 뒤 여러 번 입선하며 화가로 인정받아 갔다.
원문 · 기록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한 남녀노소의 인간상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모습이다.」 — 박수근이 남긴 글로 전하는 문장이다. 「대단히 평범한 견해」라고 스스로 적은 것이 그의 태도를 보여 준다.
쉽게 말하면 박수근 그림의 핵심은 「표면」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이미지를 실을 수 없어 말로 짚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에 있고, 고향인 강원도 양구에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양구 미술관은 그가 태어난 자리에 지었고, 건물 자체가 그의 그림의 질감을 본떠 돌로 지어졌다.
아직도 논란인 것 2007년 45억 원에 팔린 「빨래터」의 진위를 두고 소송이 있었다. 한 미술 잡지가 위작 의혹을 제기했고 경매사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2009년 법원은 위작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진작임이 적극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니어서, 논란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가려진 사람 박완서(1931~2011). 소설가다. 스무 살 무렵 미군 부대 초상화부에서 일했고, 거기서 박수근을 만났다. 그의 첫 소설 『나목』(1970)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고, 소설 속 화가 옥희도의 모델이 박수근이다.
🖼 빨래터 (1954년경) — 캔버스에 유채 · 국립현대미술관 · 양구 박수근미술관 외
그때 서양은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절정이고 파리에서는 앵포르멜이 유행하던 때다. 세계 미술이 형상을 지우고 추상으로 가는 동안, 한국의 화가는 시장에 앉은 여자를 계속 그렸다.
평범한 사람을 평범하게 그리겠다는 것은, 왜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일인가.
1970 — 점 하나를 찍고 또 찍다
뉴욕 (미국)
무슨 일이 있었나 김환기는 1963년 마흔아홉에 뉴욕으로 갔다. 이미 한국에서 이름난 화가였고 홍익대 학장이었다. 그것을 다 놓고 갔다. 뉴욕에서 그는 무명이었다.
누가 만들었나 김환기(1913~1974). 전라남도 신안 안좌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니혼대학에서 공부했고, 1930년대부터 추상화를 그렸다. 한국에서 추상을 가장 먼저 시도한 세대다.
원문 · 기록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1969).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그림의 제목이 됐다. 뉴욕에서 혼자 점을 찍던 화가가 서울의 친구가 쓴 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쉽게 말하면 점만 찍은 그림이 왜 대단한지 설명하겠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이미지를 실을 수 없어 말로 짚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있다. 김향안이 1992년에 세운 미술관이다. 그의 시기별 작품을 함께 볼 수 있고, 뉴욕 시기 일기와 편지도 전시된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그의 점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읽어야 하는가. 「점은 별이고 사람이고 그리움」이라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것이 그의 일기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나 그림 자체를 감상적으로만 읽게 만든다는 지적이 있다. 같은 시기 뉴욕의 미니멀리즘·색면추상과 나란히 놓고 형식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가려진 사람 김향안(1916~2004). 본명은 변동림이다. 1936년 시인 이상과 결혼했고, 이상은 이듬해 도쿄에서 죽었다. 스물한 살에 과부가 된 것이다.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1970) — 면포에 유채, 236×172cm · 환기미술관, 서울
그때 서양은 뉴욕에서는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자리를 잡던 때다. 뒤샹이 죽은 지 2년(1968), 워홀이 전성기였다. 김환기는 그 도시 한복판에서 아무 형태 없는 점을 손으로 찍고 있었다.
가장 단순한 것을 수만 번 반복하는 일은, 왜 사람을 그렇게 오래 붙드는가.
1974 — 부처가 텔레비전 속 자기를 보다
뉴욕 (미국)
무슨 일이 있었나 1974년, 뉴욕의 한 화랑. 나무로 만든 부처 좌상이 바닥에 앉아 있다. 그 앞에 텔레비전이 놓여 있고, 화면에는 그 부처가 실시간으로 비친다. 부처 위쪽에 폐쇄회로 카메라가 있어 부처를 찍고, 그 영상이 곧바로 텔레비전에 나온다.
누가 만들었나 백남준(1932~2006). 서울의 큰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가족과 홍콩과 일본으로 피란했고, 도쿄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하며 졸업논문으로 작곡가 쇤베르크를 다뤘다. 그 뒤 독일로 가서 음악을 공부했다.
원문 · 기록 「나는 부처를 좋아한다. 그러나 텔레비전도 좋아한다. 그래서 둘을 마주 놓았다.」 — 백남준이 이 작품에 대해 남긴 여러 발언 가운데 하나로 전한다. 그는 작품을 설명할 때 늘 짧고 농담처럼 말했다. 「나의 실험적 텔레비전은 완전 범죄가 가능한 최초의 예술이다」 같은 문장도 그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 작품을 처음 보면 「이게 왜 미술인가」 싶습니다. 불상 하나와 텔레비전 하나가 놓여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이미지를 실을 수 없어 말로 짚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이 작품은 여러 버전이 있다. 처음 것은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스테델릭)에 있고, 뉴욕 현대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를 비롯해 세계 여러 미술관이 각기 다른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TV 부처」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는가. 백남준 자신이 여러 번 「자리가 비어서 급히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그가 늘 자기 작업을 가볍게 이야기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동양과 서양, 명상과 기술의 대비는 그가 오래 다뤄 온 주제다.
가려진 사람 아베 슈야(1932~2017). 일본의 전자공학자다. 백남준의 아이디어를 실제 기계로 만든 사람이다. 1969년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일그러뜨리고 색을 입히는 장치인데, 이것이 비디오 아트의 기술적 토대가 됐다.
🖼 TV 부처 (1974) — 목조 불상, 폐쇄회로 카메라, 텔레비전 · 스테델릭 미술관(암스테르담) · 백남준아트센터 외 여러 버전
그때 서양은 뉴욕에서는 뒤샹이 죽은 뒤 개념미술이 주류가 되던 시기다. 「고른 것이 작품이다」라는 뒤샹의 논리(미술사 루트 마지막 정거장)가 「전자 장치가 작품이다」로 이어진다. 두 루트가 여기서 만난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같아질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 이미지는 저작권이 만료된 것만 싣습니다. 근현대 작가 가운데 이중섭·박수근·김환기·백남준은 아직 보호 기간 안에 있어 이미지 대신 소장처 링크를 둡니다. 「지금 어디 있나」 층의 소장처 정보는 2026년 9월 기준이며, 전시나 대여로 바뀔 수 있습니다.Images are included only where copyright has expired. Lee Jung-seob, Park Soo-keun, Kim Whanki and Nam June Paik are still in copyright, so their stops carry a museum link instead. Locations given in the “where it is now” layer are as of September 2026 and may change with loans and exhibi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