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악 — 종묘의 제사 음악에서 마당의 판소리까지
세종이 우리 음악을 적을 악보를 직접 만들던 1447년, 유럽에서는 아직 오선보가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고려가 송에서 아악을 들여온 1116년부터 종묘제례악과 영산회상과 판소리와 산조를 지나, 나라가 없어진 뒤 음반에 담긴 소리와 무형문화재 제도까지 열다섯 자리를 지도 위에 놓는다. 정거장마다 그 음악의 「무엇이 들리는지」와, 그것을 「지금 누가 연주하는지」를 적었다.In 1447, when King Sejong devised a notation that could record Korean music, staff notation in Europe was still settling into shape. Fifteen places on a map, from the arrival of Chinese ritual music in 1116 through the shrine rites, the scholars’ chamber suites, p’ansori and sanjo, to the first recordings made after the country was lost and the heritage system that followed. Each stop says what to listen for — and who plays it now.
📖 읽기 전에 — 국악 듣는 법 기초📖 Before you begin — how to listen to Korean music
국악이 지루하게 들린다면 대개 두 가지 때문입니다. 느리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겠다는 것. 둘 다 이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만 알고 가면 됩니다.If Korean traditional music sounds dull, it is usually for two reasons: it is slow, and you cannot tell where it ends. Both have explanations. Four things before you start.
① 왜 그렇게 느린가
궁중음악이 느린 것은 감상용이 아니라 의식용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절하고 술을 올리고 물러나는 동작에 맞춰야 하니, 음악이 사람의 걸음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한 음을 그냥 내지 않습니다. 소리를 내고, 흔들고, 밀어 올리고, 끌어내립니다. 이것을 농현(弄絃)이라 합니다. 서양 음악이 음과 음 사이를 이동한다면, 국악은 음 하나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니 음이 적어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듣는 요령은 하나입니다. 다음 음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울리는 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들으십시오.
② 장단 — 박자가 아니라 이야기
서양의 박자는 4분의 4처럼 같은 크기의 칸을 반복합니다. 국악의 장단은 다릅니다. 한 장단 안에 강약과 길이의 굴곡이 있고, 그 굴곡 전체가 하나의 단위입니다.
【진양조】 가장 느립니다. 슬프거나 장중한 대목에 씁니다. 【중모리】 보통 걸음. 이야기를 풀어 갈 때. 【자진모리】 빠릅니다. 사건이 몰아칠 때. 【휘모리】 가장 빠릅니다. 끝으로 몰아갈 때.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실 때 「지금 무슨 장단인가」만 알아도 이야기의 온도가 보입니다. 느려지면 슬퍼지는 것이고, 빨라지면 일이 터지는 것입니다.
③ 궁중과 민간은 다른 음악이다
이 루트가 네 장으로 나뉘는 이유입니다.
【정악(正樂)】 궁중과 사대부의 음악입니다. 느리고, 절제되어 있고, 소리를 크게 흔들지 않습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입니다. 종묘제례악, 영산회상, 가곡이 여기 듭니다.
【민속악】 광대와 무당과 농민의 음악입니다. 소리를 긁고 꺾고 떨고, 즉흥이 많고,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판소리, 산조, 시나위, 농악이 여기 듭니다.
같은 나라 음악인데 미학이 정반대입니다. 어느 쪽이 더 한국적이냐를 두고 20세기 내내 다퉜습니다.
④ 악기 몇 가지만
【거문고】 굵은 명주실 여섯 줄을 술대(막대)로 칩니다. 소리가 낮고 텁텁합니다. 선비의 악기라 「백악지장(모든 악기의 으뜸)」이라 불렀습니다.
【가야금】 열두 줄을 손가락으로 뜯습니다. 거문고보다 맑고 여립니다. 산조가 여기서 나옵니다.
【대금】 굵은 대나무 가로피리. 갈대 속껍질을 붙인 청공이 있어 세게 불면 갈라지는 소리가 납니다. 이 떨림이 대금 소리의 표식입니다.
【해금】 두 줄을 활로 켭니다. 지판이 없어 손가락으로 줄을 당겨 음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 목소리에 가장 가깝다고들 합니다.
【장구】 양쪽 가죽이 다릅니다. 왼쪽은 두껍고 낮은 소리(궁), 오른쪽은 얇고 높은 소리(딱). 이 둘의 조합이 장단을 만듭니다.
① Why it is so slow
Court music is slow because it is not for listening but for ceremony. It has to fit the bowing, the offering of wine, the withdrawal — so the music walks at the pace of a person.
And a note is never simply sounded. It is produced, shaken, pushed up, drawn down; this is nonghyeon. Western music moves between notes; Korean music moves inside one. Few notes need not mean little happening.
The trick is simple: stop waiting for the next note and listen to what the present one is doing.
② Jangdan: not a beat but a shape
Western metre repeats equal boxes — four beats, then four more. A Korean jangdan is different: within one cycle there is a contour of stress and length, and the whole contour is the unit.
Jinyangjo is the slowest, used for grief and gravity. Jungmori walks. Jajinmori is fast, for events crowding in. Hwimori is fastest, driving to the end.
Listening to p’ansori, simply knowing which jangdan is running tells you the temperature of the story: slower means sorrow, faster means something is happening.
③ Court and country are different musics
This is why the route has four chapters.
Jeongak is the music of the court and the scholar-gentry: slow, restrained, its notes not violently shaken. Not showing feeling is the virtue. The shrine rites, the chamber suites and the art songs belong here.
Minsogak is the music of entertainers, shamans and farmers: notes scraped, bent and shaken, much of it improvised, feeling pushed to the limit. P’ansori, sanjo, shinawi and farmers’ band music belong here.
One country, two opposite aesthetics — and an argument that ran through the whole twentieth century about which is the more Korean.
④ A few instruments
The geomungo has six thick silk strings struck with a short rod; its sound is low and grainy. As the scholar’s instrument it was called the head of all instruments.
The gayageum has twelve strings plucked with the fingers, clearer and lighter than the geomungo. Sanjo grows out of it.
The daegeum is a large transverse bamboo flute with a membrane of reed pith over one hole; blown hard, it buzzes. That rasp is its signature.
The haegeum is a two-string fiddle with no fingerboard: pitch is made by pulling the strings, which is why it is said to come closest to the human voice.
The janggu has two different heads — thick and low on the left, thin and high on the right. Their combination makes the jangdan.
하늘과 조상에게 1116 ~ 18세기
처음에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것이었다. 하늘에 제사하고 공자에게 절하고 조상에게 술을 올리는 동안 울리는 소리다. 느린 것이 흠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적어 두려고 한 임금이 악보를 만들었다.
1116 — 송나라에서 악기 428점이 오다
개경 (개성)
무슨 일이 있었나 1116년, 고려 예종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음악을 청했다. 송 휘종이 보내온 것은 악기 428점과 악보와 무용 도구 일습이었다. 편종, 편경, 금, 슬, 소, 훈, 지 같은 이름의 악기들이다. 이것을 대성아악(大晟雅樂)이라 한다.
누가 만들었나 보낸 사람은 송 휘종(1082~1135)이다. 그림과 글씨로 이름난 황제이고 예술에는 뛰어났으나 나라는 망하게 했다. 1127년 금나라에 잡혀가 그곳에서 죽는다. 그가 만든 대성부(大晟府)라는 음악 관청에서 정리한 음악이 대성아악이다.
원문 · 기록 「예종 11년(1116) 6월, 송에서 새로 만든 대성악을 보내왔다. 왕이 이를 받아 태묘와 사직에 쓰게 하였다.」 — 『고려사』 악지(樂志). 『고려사』는 조선 초에 편찬됐으니 이 기록도 300년 뒤에 정리된 것이다. 다만 악기 목록과 수량이 자세히 적혀 있어, 무엇이 왔는지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을 한 문장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음악의 첫 장은 「수입」으로 시작합니다.
무엇이 들리나 문묘제례악을 들으실 때 먼저 「한 음이 얼마나 긴가」를 재어 보십시오. 한 음이 4초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다음 음으로 넘어갑니다. 음 하나마다 편종이나 편경이 한 번 울려 구분해 줍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문묘제례악은 지금도 연주된다. 서울 성균관 대성전에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연주한다. 국가무형유산이다.
아직도 논란인 것 지금 연주하는 문묘제례악이 1116년의 그 음악인가. 아니다. 조선 세종 때 박연이 대대적으로 정비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손질됐으며, 20세기 이왕직아악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중간에 끊긴 적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가려진 사람 고려의 향악(鄕樂). 아악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 땅에는 음악이 있었다. 「동동」, 「정읍사」, 「청산별곡」 같은 고려가요가 그것이고,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거문고와 가야금과 향피리가 있었다.
♪ 문묘제례악 — 한 음이 4초쯤 이어지고 편종과 편경이 그 사이를 짚는다. 지금 세계에서 이 계통을 실제로 연주하는 곳은 서울뿐이다.
그때 서양은 유럽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시대다. 파리 노트르담 악파가 여러 성부를 겹치는 다성음악을 시작하는 것이 이보다 70년쯤 뒤다. 오선보는 아직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온 음악을 900년 동안 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누구의 음악인가.
1447 — 임금이 악보를 만들다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1447년 무렵, 세종이 새 악보를 만들었다. 정간보(井間譜)다. 「정(井)」자 모양의 네모 칸을 세로로 쌓고, 한 칸을 한 박으로 삼아 그 안에 음 이름을 적는다. 칸이 비면 앞의 음이 이어지는 것이고, 한 칸을 둘로 나누면 반박이다.
누가 만들었나 세종(1397~1450)이 음악에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는 실록에 남아 있다. 그는 절대음감에 가까운 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세종이 「이칙(음 이름) 소리가 조금 높다」고 지적했고, 살펴보니 돌에 먹줄 자국이 덜 갈려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문 · 기록 「임금은 음률에 밝아 신악의 절주가 모두 임금이 지은 것인데, 막대기로 땅을 치며 하루 저녁에 다 이루었다.」 —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1449) 12월 11일. 임금이 작곡을 했다는 기록이다. 정간보에 대한 직접 기록은 없어서, 세종이 직접 만들었는지 악학 관원들이 만들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악보가 왜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들리나 여민락(與民樂)을 들어 보십시오. 세종 때 만든 음악이고 지금도 연주됩니다.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입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연주한다. 여민락, 수제천, 영산회상 같은 정악 곡이 정기 공연으로 오른다. 국립국악원은 1951년 부산 피란지에서 문을 열었고, 이왕직아악부의 인력과 악보를 이어받았다.
아직도 논란인 것 정간보를 세종이 직접 만들었는가. 실록에 그런 기록이 없다. 악학 관원들이 만들었을 가능성, 세종의 지시로 정리됐을 가능성이 함께 제시된다.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구조가 같다.
가려진 사람 맹사성(1360~1438).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재상인데,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가 만들었다는 「강호사시가」가 전하고,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불었다는 이야기가 여럿 남아 있다. 궁중음악 정비 초기에 그가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 여민락 — 세종 때 만든 음악. 대단히 느리게 시작해 뒤로 갈수록 조여 간다. 정악의 진행 방식이 여기 다 있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뒤파이가 활동하던 부르고뉴 악파의 시대다. 오선보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고, 인쇄된 악보가 나오는 것은 이보다 50년쯤 뒤다. 음악을 적는 방법을 두 문명이 각각 정비하던 시기다.
적을 수 없는 음악과 적힌 음악 가운데, 무엇이 더 오래 사는가.
1464 — 잔치 음악을 제사에 올리다
한양 종묘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세종이 만든 「보태평」과 「정대업」은 원래 잔치 음악이었다. 조상의 문덕과 무공을 기리는 노래로, 회례연(임금이 신하들과 하는 잔치)에서 쓰라고 만든 것이다.
누가 만들었나 세조(1417~1468)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다. 계유정난(1453)으로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폐하고 사약을 내렸다. 한국미술사 루트의 몽유도원도 정거장에 나오는 그 사건이다.
원문 · 기록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 된 일인가.」 — 『세종실록』에 전하는 세종의 말이다. 한 문장이 이 정거장의 전부를 설명한다. 세종은 실행하지 못했고, 24년 뒤 아들이 실행했다.
쉽게 말하면 종묘제례악이 세계적으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종묘제례악은 문묘제례악보다 훨씬 듣기 좋습니다. 향악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종묘대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서울 종묘에서 열린다. 11월에도 한 차례 지낸다. 무료이고 누구나 볼 수 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지고, 영녕전과 정전에서 차례로 지낸다.
아직도 논란인 것 지금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이 세조 때의 그것과 얼마나 같은가. 조선 후기를 지나며 속도가 크게 느려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빨랐으리라는 견해가 있고, 이왕직아악부 시기에 정리된 형태가 지금의 기준이 됐다.
가려진 사람 악공(樂工)과 악생(樂生). 종묘제례악을 실제로 연주한 사람들이다. 조선의 신분 체계에서 이들은 천인에 가까웠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대대로 세습했고, 다른 직업을 택할 수 없었다.
♪ 종묘제례악 — 보태평 · 정대업 — 문덕을 기리는 보태평은 부드럽고, 무공을 기리는 정대업은 태평소가 들어와 확 열린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첫 목록(2001).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조스캥 데 프레의 세대가 자라던 때다. 교회음악에서 여러 성부가 얽히는 다성음악이 절정으로 가고 있었다. 같은 시기 조선의 종묘에서는 한 선율을 여러 악기가 함께 가는 음악이 울렸다.
조상이 살아서 듣던 음악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왜 348년이나 걸려 실현됐는가.
18세기 — 길에서 울리는 음악
한양 (서울) · 궁궐 앞길
무슨 일이 있었나 대취타(大吹打)는 임금이 거둥하거나 군대가 행진할 때 연주하는 음악이다. 이름 그대로 크게 불고(취) 두드리는(타) 음악이다.
누가 만들었나 연주한 사람들은 군영에 속한 취고수(吹鼓手)들이다. 군인이면서 악사였다. 훈련도감, 어영청 같은 군영마다 악대를 두었고, 행진과 신호와 의식에 썼다.
원문 · 기록 「명금일하 대취타 하랍신다(鳴金一下 大吹打 하랍신다).」 — 대취타를 시작할 때 집사가 외치는 구령. 「쇠(징)를 한 번 울리고 대취타를 하라 하신다」는 뜻이다. 한문과 우리말이 섞여 있다. 300년 넘게 같은 말로 시작한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음악이 무엇을 위해 있는가」를 묻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먼저 시작을 들으십시오. 사람 목소리로 구령이 나오고 징이 한 번 울립니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 나옵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국립국악원과 각 지방 국악단이 연주하고, 서울 경복궁과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의식에서 매일 들을 수 있다. 무료다. 서울에서 국악을 가장 쉽게 접하는 방법이 이것이다.
아직도 논란인 것 대취타의 성립 시기가 확정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의 취타 관련 기록이 있으나 지금 형태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연주하는 대취타는 조선 후기, 특히 정조 시대 행렬 의식이 정비되면서 자리 잡은 형태로 본다.
♪ 대취타 — 구령과 징 한 번으로 시작한다. 태평소만 선율을 내고 나머지는 리듬이거나 한 음짜리 울림이다. 경복궁 수문장 교대에서 매일 들을 수 있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바흐와 헨델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궁정의 행진곡과 군악대가 유럽에도 있었고, 오스만 제국의 군악대(메흐테르)가 빈을 포위하며 유럽 음악에 「터키풍」 유행을 남긴 것이 이 무렵이다. 크게 부는 음악은 어디서나 군대와 함께 있었다.
감상하라고 만들지 않은 음악이 가장 신나는 음악이 되었다면, 음악의 목적은 누가 정하는가.
선비의 방 15세기 ~ 19세기
제사가 아니라 사랑방에서 울리는 음악이 생긴다. 몇 사람이 마주 앉아 거문고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남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즐기는 음악이라, 청중이 없어도 되는 음악이 됐다.
16세기 — 선비가 거문고를 안다
안동 도산 (경상북도)
무슨 일이 있었나 조선의 사대부에게 음악은 취미가 아니라 공부였다. 유교에서 군자가 갖춰야 할 여섯 가지 기예(육예) 안에 악(樂)이 들어 있다. 예를 배우고 음악을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여겼다.
누가 만들었나 이황이 「도산십이곡」의 발문에 쓴 말이 있다. 한시로 된 노래는 읊을 수 있어도 노래할 수 없고, 노래하려면 우리말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말 시조 열두 수를 지었다. 앞의 여섯 수는 뜻을 말하고(언지), 뒤의 여섯 수는 배움을 말한다(언학).
원문 · 기록 「한시는 읊을 수는 있으나 노래할 수는 없다. 노래하려면 반드시 우리말로 엮어야 하니, 우리말의 음절과 가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 이황, 「도산십이곡 발(跋)」(1565). 우리말 노래를 지은 이유를 밝힌 글이다. 훈민정음이 나온 지 120년 뒤, 사대부가 우리말로 노래를 짓는 일이 아직 설명을 필요로 했다.
쉽게 말하면 풍류방(風流房)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비들이 모여 음악을 하던 방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거문고 소리를 먼저 익히십시오. 술대로 줄을 칠 때 「탁」 하고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함께 납니다. 이 소리를 대현 두드리는 소리라 하는데, 거문고 음악에서는 이것도 음악의 일부입니다. 잡음이 아닙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가곡(歌曲)은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국가무형유산이기도 하다. 남창과 여창으로 나뉘고, 보유자와 전수자가 이어 가고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황이 실제로 거문고를 얼마나 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집에 거문고 이야기가 나오지만 연주 수준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조선 사대부의 「음악 애호」가 실제 연주였는지 담론이었는지를 두고 논의가 있다.
가려진 사람 기녀(妓女)들. 조선의 풍류방에서 실제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녀였다. 이들은 시를 짓고 노래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다루었다. 사대부의 풍류는 이들 없이 성립하지 않았다.
♪ 가곡과 거문고 — 한 글자를 몇 초씩 끄는 노래.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흠이 아니라 방식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2010).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팔레스트리나와 라수스의 시대다. 마드리갈이 유행하며 몇 사람이 모여 노래하는 실내 음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랑방과 살롱, 이름은 달라도 몇 사람이 마주 앉아 음악하는 자리가 양쪽에 생겼다.
남에게 들려주지 않는 음악은, 무엇을 위해 연주되는가.
17~18세기 — 불교 노래가 기악 모음곡이 되다
한양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영산회상(靈山會相)은 지금 정악의 대표곡이다. 그런데 원래는 노래였다.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이라는 일곱 글자를 부르는 불교 노래다. 영산은 석가가 법화경을 설한 영취산이고, 그 모임을 뜻한다.
누가 만들었나 이 곡에는 작곡자가 없다. 여러 세대의 연주자들이 조금씩 바꾸고 늘리며 만들어진 음악이다. 서양 음악사가 작곡자 이름으로 서는 데 비해, 국악의 상당 부분은 그렇지 않다.
원문 · 기록 「병란을 만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남원에 이르렀는데, 마침 거문고를 아는 이를 만나 이 악보를 만들었다.」 — 『양금신보』(1610) 서문의 취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2년 뒤, 피난지에서 만들어진 악보다. 이 악보에 실린 영산회상이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이른 형태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이 곡을 한 문장으로 하면 「가사가 사라진 자리에 음악이 자란 곡」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첫 곡 상령산을 들으실 때는 속도를 재지 마십시오. 재면 답답합니다. 한 장단이 20초 가까이 갑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정기적으로 연주한다. 전곡 연주는 한 시간이 넘어 흔치 않고, 대개 몇 곡을 골라 연주한다.
아직도 논란인 것 가사가 언제 어떻게 떨어졌는지 확정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 기록에는 노래로 나오고 후기 악보에는 기악으로 나오므로 그 사이에 바뀐 것은 분명한데,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교 억압 때문이라는 설명이 흔히 쓰이지만 직접 증거는 없다.
가려진 사람 양금(洋琴). 이름 그대로 서양 악기다. 사다리꼴 상자에 금속 줄을 여러 벌 걸고 작은 대나무 채로 친다. 유럽의 덜시머가 중국을 거쳐 18세기에 조선에 들어왔다.
♪ 영산회상 — 아홉 곡짜리 모음곡. 상령산 5분과 마지막 군악 5분을 이어 들으시면 이 곡의 폭이 한 번에 보인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바흐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쓰고 비발디가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무렵이다. 여러 성부가 각자 다른 선율로 얽히는 대위법이 절정에 있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한 선율을 여러 악기가 조금씩 어긋나게 가는 방식이 다듬어지고 있었다.
가사가 사라진 뒤에 음악이 더 길어졌다면, 그 음악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소리가 마당으로 18세기 ~ 1900
광대 한 사람과 북 하나로 여덟 시간을 끌고 가는 음악이 나타난다. 무당의 굿판에서 기악 즉흥이 갈라져 나온다. 천대받던 사람들이 만든 음악이 200년 만에 이 나라를 대표하게 된다.
18세기 — 한 사람과 북 하나로 여덟 시간
남원 · 전주 일대 (전라북도)
무슨 일이 있었나 18세기 어느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 새로운 음악이 나타났다. 소리꾼 한 사람이 서서 노래하고, 고수 한 사람이 앉아 북을 친다.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 둘이 이야기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간다. 춘향가는 완창하면 여덟 시간이 넘는다.
누가 만들었나 초기 소리꾼들의 이름은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19세기에 이르러 「전기 팔명창」, 「후기 팔명창」이라는 이름으로 명창들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박유전 같은 이름이다.
원문 · 기록 「광대의 노래로 춘향의 일을 엮은 것이 있어 그 대강을 시로 옮긴다.」 — 유진한, 『만화집(晩華集)』의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1754)의 취지. 충청도 선비가 호남을 여행하다 듣고 한시 200구로 옮겼다. 판소리를 언급한 가장 이른 문헌이다. 이 시가 없었다면 18세기 중엽에 이미 춘향가가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쉽게 말하면 판소리가 세계적으로 특이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한 대목만 골라 들으십시오. 춘향가의 「쑥대머리」나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 흔히 권해집니다. 전곡을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판소리는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국가무형유산이기도 하다. 다섯 바탕 —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 마다 보유자가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판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가 확정되지 않았다. 무당의 굿에서 나왔다는 설(무가 기원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 세습무 집안 출신이 많다는 점, 굿의 서사무가와 구조가 닮았다는 점이 근거다. 광대 집단의 소리에서 나왔다는 설, 판놀음의 한 종목이었다는 설도 있다.
가려진 사람 사라진 일곱 바탕.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옹고집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이다.
♪ 판소리 춘향가 — 쑥대머리 — 옥에 갇힌 춘향이 부르는 대목. 진양조로 느리게 간다. 전곡은 여덟 시간이니 이 한 대목만 들으셔도 된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바흐가 죽은 지 얼마 안 됐고 하이든이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오페라가 이미 150년 전부터 있었지만 그것은 수십 명이 하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하고 북 하나가 반주하는 형식은 유럽에 없었다.
가장 천대받던 사람들이 만든 음악이 나라를 대표하게 되기까지, 무엇이 바뀌어야 했는가.
1870 — 떠도는 소리를 글로 붙잡다
고창 (전라북도)
무슨 일이 있었나 신재효(1812~1884)는 고창의 아전이었다. 관아에서 실무를 보던 중인이다. 재산을 모았고, 그 돈으로 소리꾼들을 후원했다. 자기 집에 소리꾼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며 가르쳤다.
누가 만들었나 신재효는 소리꾼이 아니었다. 소리를 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대신 이론과 사설과 후원을 맡았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듀서이자 극작가에 가깝다.
원문 · 기록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다음 득음이요, 그다음 너름새라.」 — 신재효, 「광대가」(19세기 후반). 좋은 소리꾼의 조건을 네 가지로 정리한 대목이다. 소리(득음)를 셋째에 둔 것이 눈에 띈다. 판소리가 노래만이 아니라 연기와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임을 이론으로 밝힌 첫 글이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기록이 무엇을 하는가」를 묻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도리화가」를 들어 보십시오. 신재효가 진채선을 그리며 지은 노래입니다. 판소리 다섯 바탕에 들지 않는 단가(짧은 노래)입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신재효 고택이 고창에 남아 있다. 국가민속문화유산이고, 옆에 판소리박물관이 있다. 그가 소리꾼들을 데려다 가르치던 자리다.
아직도 논란인 것 신재효의 작업을 「정리」로 볼 것인가 「개작」으로 볼 것인가. 이것이 판소리 연구의 오랜 쟁점이다. 그가 판소리를 문학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광대의 생생한 언어를 양반 취향으로 순화해 버렸다는 비판이 맞선다.
가려진 사람 진채선(1847~?). 한국 최초의 여성 판소리 명창이다. 고창 무당 집안 출신으로 신재효에게 배웠다.
♪ 단가 「도리화가」 — 신재효가 진채선을 그리며 지은 짧은 노래. 판소리를 처음 들으실 때는 이런 단가부터가 좋다. 5분이면 끝난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를 쓰고 있었고 브람스가 활동하던 때다. 유럽이 관현악을 키우고 극장을 짓는 동안, 이곳에서는 한 사람과 북 하나로 하는 여덟 시간짜리 이야기가 문자로 정리되고 있었다.
떠도는 소리를 글로 붙잡을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1890 — 악기 하나가 혼자 이야기하다
영암 (전라남도)
무슨 일이 있었나 1890년대, 전라도 영암의 김창조(1856~1919)가 가야금으로 새로운 음악을 짰다. 산조(散調)다. 「흩어진 가락」이라는 뜻이다.
누가 만들었나 김창조는 영암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무업(巫業)과 관련된 집안으로 본다. 가야금과 양금과 퉁소를 다루었고, 굿판과 잔치에서 연주하며 살았다.
원문 · 기록 산조에는 악보가 없었다. 스승이 타면 제자가 보고 듣고 따라 쳤다. 구전심수(口傳心授) —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준다는 말이 이 방식을 가리킨다. 20세기에 채보가 시작되면서 악보가 생겼는데, 그것은 특정 연주자의 특정 연주를 적은 것이지 「원곡」이 아니다. 이 정거장에 인용할 원문이 없는 것 자체가 이 음악의 성격이다.
쉽게 말하면 산조가 왜 중요한지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가야금산조를 들으실 때, 먼저 시작의 느림을 견디십시오. 진양조입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이 음악의 절반을 못 듣습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가야금산조 및 병창은 국가무형유산이다. 유파별로 보유자가 있고, 국립국악원과 대학 국악과에서 가르친다.
아직도 논란인 것 김창조가 산조의 창시자인가. 이것이 오래된 쟁점이다. 그가 처음 틀을 만들었다는 통설에 대해, 그 이전에 이미 유사한 즉흥 기악이 있었고 그가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백낙준이 거문고산조를 먼저 했다는 주장도 있다.
가려진 사람 시나위. 산조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음악이다. 남도 굿판에서 무당의 노래에 맞춰 악사들이 함께 즉흥으로 연주하는 기악이다.
♪ 가야금산조 — 아주 느리게 시작해 끝에는 열 배로 빨라진다. 국악을 처음 들으시는 분께 가장 먼저 권하는 곡이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드뷔시가 활동을 시작하고 말러가 교향곡을 쓰던 무렵이다. 서양 음악이 화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던 시기에, 이곳에서는 화성 없이 악기 하나와 장구 하나로 한 시간을 채우는 음악이 만들어졌다.
말 없이 악기 하나가 한 시간을 끌고 갈 수 있다면,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19세기말 — 마을 전체가 악기를 든다
전라도 · 경상도 마을들
무슨 일이 있었나 농악은 마을의 음악이다. 정월 대보름에 지신밟기를 하고, 모내기와 김매기를 할 때 논에서 치고, 추수가 끝나면 마당에서 논다. 전문 음악가가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들이 한다.
누가 만들었나 농악에는 작곡자도 없고 명인의 계보도 뚜렷하지 않다. 마을마다 상쇠가 있었고, 그 사람이 가락을 이어 갔다. 상쇠가 죽으면 다음 사람이 이었다.
원문 · 기록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며 집집을 돌아 지신을 밟으니, 그 소리가 밤새 그치지 않았다.」 — 조선 후기 세시풍속 기록에 흔히 나타나는 종류의 서술이다. 『동국세시기』(1849) 등에 정월 놀이와 풍물에 관한 기록이 있다. 농악은 문헌보다 몸에 남은 음악이라 기록이 적다. 사람들이 매년 했기 때문에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농악을 이 루트에 넣는 이유는 「누가 음악을 하는가」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농악을 들으실 때는 꽹과리부터 찾으십시오. 가장 높고 날카롭습니다. 상쇠가 이것을 치며 가락을 이끕니다. 신호도 꽹과리로 줍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농악은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국가무형유산으로는 진주삼천포농악, 평택농악, 이리농악, 강릉농악, 임실필봉농악, 구례잔수농악, 김천금릉빗내농악 등 여러 지역 농악이 각각 지정되어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사물놀이가 농악의 발전인가 축소인가. 무대화를 통해 살아남고 세계에 알려졌다는 평가와, 마당에서 여럿이 움직이며 하던 음악을 넷이 앉아서 하는 것으로 바꿔 본질이 빠졌다는 비판이 맞선다. 두 견해가 다 근거가 있다.
가려진 사람 바우덕이(김암덕, 1848~1870). 남사당패의 꼭두쇠(우두머리)였다. 여자가 남사당패에 들어가는 것도 드문데 우두머리가 됐다.
♪ 농악 · 사물놀이 — 꽹과리가 이끌고 징이 큰 호흡을 잡는다. 녹음으로는 절반만 들린다 — 원래는 서서 움직이며 하는 음악이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민속음악을 채집하기 시작하던 때다. 20년쯤 뒤 버르토크와 코다이가 헝가리 농촌을 돌며 농민의 노래를 축음기로 녹음한다. 유럽이 마을 음악을 「발견」하던 시기에, 이곳의 마을 음악은 아직 마을에서 살아 있었다.
전문가가 없는 음악과 전문가의 음악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오래 사는가.
나라가 없어진 뒤의 소리 1907 ~ 지금
궁이 없어지면 궁중음악은 어떻게 되는가. 음반이 들어오면 여덟 시간짜리 판소리는 어떻게 되는가. 20세기의 국악은 그 질문에 답해 온 시간이다. 이어진 것과 끊긴 것이 여기서 갈린다.
1907 — 여덟 시간짜리 소리를 3분에 담다
경성 (서울) · 도쿄 · 오사카
무슨 일이 있었나 1907년, 미국 컬럼비아사와 빅터사가 한국 음악가들을 데려가 녹음했다. 한국 음악의 첫 상업 음반이다. 판소리 명창 한인오와 기생 최홍매 등이 일본에서 녹음했다.
누가 만들었나 1907년 첫 녹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한인오와 최홍매의 이름이 전한다. 이들이 도쿄에서 녹음했고, 음반이 미국에서 제작되어 한국에 들어왔다.
원문 · 기록 1907년의 첫 음반 이후 1945년까지 발매된 한국 관련 음반은 수천 종에 이른다. 국립국악원과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단이 이 시기 음반을 발굴하고 복각해 왔다. 음반 딱지(레이블)에 적힌 곡명과 연주자 이름이 이 시기 음악사의 1차 자료다. 문헌이 아니라 물건이 기록이 됐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기술이 예술을 바꾼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1930년대 SP 음반 복각을 들어 보십시오. 국립국악원이 복각 음반을 냈고 온라인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이 시기 음반은 지금 자료로 쓰인다. 국립국악원 국악아카이브,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단, 국립중앙도서관에 자료가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음반이 판소리에 이로웠는가 해로웠는가. 명창의 소리를 남겼다는 점은 분명한 이득이다. 반면 「토막 소리」가 표준이 되면서 완창 능력이 약해졌다는 지적이 오래 있었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에는 완창 공연이 거의 사라졌다가 1968년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 이후 되살아났다.
가려진 사람 기생 음반. 1910~30년대 음반 가운데 상당수가 기생들이 부른 것이다. 잡가, 민요, 시조, 가사를 불렀고, 유행가도 불렀다.
♪ 1930년대 SP 음반 복각 — 지지직거리는 잡음 아래 목소리가 있다. 고수의 추임새도 관객 소리도 없다 — 무엇이 빠졌는지를 들어 보시라.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루소가 음반으로 세계적 스타가 된 것이 1900년대이고, 3분이라는 길이가 대중음악의 표준이 된 것도 이때다. 기술이 음악의 형태를 정하는 일은 어디서나 같았다.
여덟 시간짜리 음악을 3분에 담아야 했을 때, 사라진 다섯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1911 — 궁이 없어진 뒤의 궁중음악
경성 (서울)
무슨 일이 있었나 1910년 나라가 없어졌다. 조선의 궁중음악을 맡던 장악원은 어떻게 됐는가.
누가 만들었나 함화진(1884~1948)이 아악부의 마지막 아악사장이었다. 대대로 악사를 지낸 집안 출신이다. 그가 궁중음악 악보를 정리하고 아악부원양성소를 이끌었다.
원문 · 기록 장악원 악사 수는 조선 말 700명 안팎이었으나 1917년에는 57명으로 줄었다. 이왕직아악부의 인원과 예산 변화는 당시 기록과 연구로 확인된다. 숫자 하나가 상황 전부를 말한다. 나라가 없어지면 그 나라의 의례가 없어지고, 의례가 없어지면 그 음악을 하는 사람도 없어진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이 루트에서 가장 무거운 자리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이 시기의 녹음이 남아 있습니다. 1930년대에 이왕직아악부가 연주한 음원이 일부 전합니다. 지금 연주와 비교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국립국악원이 그 후신이다. 1951년 부산 피란지에서 문을 열었고, 이왕직아악부 출신 악사들이 중심이었다. 지금 서울 서초구에 본원이 있고 남원·진도·부산에 분원이 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왕직아악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것이 한국 음악사의 가장 곤란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가려진 사람 장악원의 세습 악사 집안들. 조선 500년 동안 궁중음악은 특정 집안이 대를 이어 맡았다. 아버지가 악사면 아들도 악사였다.
♪ 1930년대 이왕직아악부 녹음 — 지금 연주와 비교해 들어 보면 속도와 음색이 다르다. 잡음 많은 음질 그 자체가 이 시기의 소리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1913)이 초연을 앞두고 있었다. 서양 음악이 조성을 부수며 앞으로 달려가던 시기에, 이곳에서는 500년 된 음악을 어떻게든 남기는 일이 과제였다. 같은 시간에 한쪽은 부수고 한쪽은 붙들고 있었다.
쓰임이 사라진 음악을 남기기 위해 보존 대상으로 만들 때, 그 음악은 살아 있는 것인가.
1948 — 여자들만 무대에 서다
서울 · 대구 · 부산
무슨 일이 있었나 1902년 서울에 협률사라는 극장이 생겼다. 판소리를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고,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하던 것을 여러 사람이 나눠 맡는 형태가 나왔다. 창극(唱劇)이다. 판소리에 배우와 무대와 조명이 붙은 것이다.
누가 만들었나 임춘앵(1923~1975)이 가장 유명했다. 전남 함평 출신으로 판소리와 무용을 배웠고, 남장을 하고 주역을 맡았다. 무대에서 칼을 들고 춤추는 모습이 인기였다. 그가 이끄는 극단이 전국을 돌았다.
원문 · 기록 여성국극에 대한 당대 기록은 신문 광고와 공연 전단, 그리고 관객의 회고에 주로 남아 있다. 학술적 기록이 적다. 「저속한 흥행물」로 분류되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연구자들이 생존 배우들을 인터뷰해 구술 자료를 모았다. 무엇을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가 무엇이 남는가를 정한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무엇이 전통으로 인정받는가」를 묻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여성국극의 음원과 영상은 많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것을 찾아 들으시면 판소리와 다른 점이 바로 들립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거의 끊겼다. 여성국극보존회가 있고 몇몇 원로 배우가 생존해 있으나, 정기 공연은 드물다.
아직도 논란인 것 여성국극이 왜 무형문화재에서 빠졌는가. 「근대에 성립되어 전통성이 없다」는 것이 공식 이유에 가깝다. 그러나 여성만의 장르였다는 점, 대중 흥행물이었다는 점이 작용했다는 지적이 오래 있었다. 지정 기준이 남성 중심의 예술 개념을 전제했다는 비판이다.
가려진 사람 조모란, 김진진, 김경수 같은 배우들. 임춘앵 다음 세대의 여성국극 배우들이다. 1960년대에 무대에 섰으나 장르가 무너지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
♪ 여성국극 · 창극 — 판소리 어법을 쓰되 여럿이 배역을 나눠 부른다. 남은 자료가 적어 찾아 들으셔야 한다.
그때 서양은 서양에서는 바지 역(male impersonation)이 오페라에 오래 있었다. 다만 그것은 배역의 관습이었지 장르 전체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1913년부터 여성만으로 공연해 왔고, 여성국극과 자주 비교된다.
무엇을 전통이라 부를지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1950 — 북으로 간 사람들
평양 (북한)
무슨 일이 있었나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국악인 여럿이 북으로 갔다. 자진해 간 사람도 있고 전쟁 중에 끌려간 사람도 있다. 두 경우를 구분하기 어려운 기록이 많다.
누가 만들었나 안기옥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김창조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남한에서 그의 산조 계보가 이어지는데, 정작 본인은 북에 있었다. 북에서 그는 민족음악 이론을 세우고 후학을 가르쳤다. 1974년 평양에서 죽었다.
원문 · 기록 북한의 음악 정책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이라는 원칙 아래 정리됐다. 판소리의 탁성을 배격하고 맑은 발성을 쓰도록 한 것, 악기를 개량해 서양식 관현악에 맞춘 것이 그 결과다. 남한에서는 「원형 보존」이 원칙이 됐다. 같은 음악을 두고 한쪽은 「개조해야 인민의 음악이 된다」 하고 다른 쪽은 「그대로 두어야 전통이 된다」 했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은 이 루트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자리입니다. 사실만 적겠습니다.
무엇이 들리나 북한의 가야금 연주를 찾아 들어 보십시오. 유튜브 등에 공연 영상이 있습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 남한에서는 월북 국악인의 이름을 1988년 해금 이후 다시 쓸 수 있게 됐다. 안기옥과 정남희의 이름이 산조 계보 설명에 복원됐다.
아직도 논란인 것 월북과 납북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전쟁 중의 일이라 기록이 부실하고, 남북 양쪽의 서술이 다르다. 개별 인물에 대해 단정하기 어렵다.
가려진 사람 이름이 지워진 채 음악만 전해진 시기의 학생들. 1950년대부터 1988년까지 남한에서 국악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가 배우는 산조의 계보에서 한 사람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거나 모른 채 배웠다.
♪ 북한의 개량 가야금 — 21현에 나일론 줄. 음역이 넓고 소리가 크며, 남한 산조의 그 크게 흔드는 농현이 거의 없다.
그때 서양은 같은 시기 동유럽에서도 국가가 민속음악을 정책적으로 개조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민속 악단을 만들고 악기를 개량해 대규모 합주로 만들었다. 북한의 방식은 그 흐름과 닿아 있다.
같은 음악이 두 갈래로 갈렸을 때, 어느 쪽이 그 음악인가.
1964 — 음악을 지정하기 시작하다
서울 서초 (국립국악원)
무슨 일이 있었나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만들어지고 1964년부터 무형문화재 지정이 시작됐다. 제1호가 종묘제례악이다. 그다음이 양주별산대놀이, 꼭두각시놀음, 갓일, 판소리 순으로 이어졌다.
누가 만들었나 제도를 만든 사람들 가운데 예용해(1929~1995)라는 기자가 있다. 한국일보에 「인간문화재」라는 연재를 썼다. 사라져 가는 장인과 예인을 찾아다니며 기록한 글이다. 이 연재가 여론을 만들었고 제도 도입의 배경이 됐다.
원문 · 기록 「인간문화재」 — 예용해가 1960년대 초 연재에서 쓴 말이다. 법에는 없는 말이지만 지금 누구나 쓴다. 무형의 기예는 물건에 담기지 않고 사람 안에만 있으므로, 그 사람을 지켜야 기예가 지켜진다는 뜻이다. 이 루트가 「지금 누가 연주하나」 층을 두는 이유와 같다.
쉽게 말하면 이 정거장이 이 루트의 마지막이자 요약입니다.
무엇이 들리나 마지막으로 지금의 국악을 들어 보십시오.
지금 누가 연주하나 무형유산 제도는 지금도 운영된다. 2015년 무형문화재법이 따로 만들어졌고, 2024년부터는 「국가무형유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직도 논란인 것 무형유산 제도가 국악을 살렸는가 박제했는가. 이것이 이 분야의 근본 논쟁이다.
가려진 사람 지정되지 못한 것들. 여성국극이 대표적이고, 그 밖에도 여럿이다. 지역의 소규모 민속음악, 사라진 판소리 일곱 바탕, 특정 유파의 산조, 무속 음악의 여러 갈래.
♪ 지금의 국악 — 국립국악원 정악부터 이날치와 잠비나이까지. 「이것도 우리 음악인가」라는 질문은 900년 동안 반복돼 왔다.
그때 서양은 유럽에서도 20세기 후반에 무형유산 보호가 논의됐다. 유네스코가 1989년 「전통문화 및 민속 보호에 관한 권고」를 채택하고 2003년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을 만들었다. 한국의 1964년 제도는 세계적으로 이른 편이고, 유네스코 제도를 만들 때 참고 사례가 됐다.
지켜야 남는 음악과, 변해야 사는 음악은 같은 음악인가.
음원은 라이선스가 확인된 것만 파일로 싣습니다. 그 밖의 정거장에는 국립국악원 아카이브와 공연 영상 등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링크를 둡니다. 「지금 누가 연주하나」의 정보는 2026년 9월 기준이며, 보유자 인정과 단체 사정은 바뀔 수 있습니다.Recordings are included as files only where the licence is confirmed; other stops link to places where the music can be heard, chiefly the National Gugak Center’s archive and performance videos. The “who plays it now” layer is current as of September 2026 and may ch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