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AD 704 ~ 787 (추정) · 장안(당) — 신라에서 나서 돌아가지 않았다
스무 살에 인도로 떠나 다시는 고향을 밟지 못한 사람 — 그가 본 것만 적은 여행기
그가 살았던 시대
8세기는 구법의 시대였다. 5세기의 법현, 7세기의 현장과 의정에 이어, 진리의 원본을 확인하려는 승려들이 사막과 바다를 건넜다. 신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원측은 장안에서 유식학의 대가가 되었고 의상은 화엄을 배워 돌아왔다. 그러나 정작 인도까지 갔다가 기록을 남긴 신라인은 혜초 한 사람뿐이다. 그가 도착한 인도의 불교는 이미 기울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아랍 세력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뒤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 교차로를 정확히 통과한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 해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나를 위해 계림으로 날아가리(誰爲向林飛)." — 『왕오천축국전』, 남천축에서 지은 오언시
기러기는 편지를 나르는 새다. 옛사람들은 소식 자체를 안서(雁書), 곧 기러기 편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열대에는 기러기가 없다. 그러니 이 시는 "고향이 그립다"가 아니라 "소식을 전할 방법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구름은 돌아가는데 나는 못 가고, 편지를 부치려니 새가 없다. 마지막 구의 계림은 신라를 가리키는 옛 이름 — 이 두 글자가 1,200년 뒤 이 여행기의 저자를 밝히는 단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왕은 비록 돌궐이나 삼보를 깊이 공경하고 믿는다(王雖突厥 甚敬信三寶)." — 『왕오천축국전』 건타라국 조
"비록"이라는 한 글자에 그의 놀라움이 들어 있다. 그는 종족과 믿음이 붙어 다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 그 둘이 갈라져 있었다. 답을 쓰는 대신 놀란 채로 기록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가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는지까지 읽을 수 있다. 기록자의 편견이 지워지지 않은 기록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려 주는 경우다.
삶이 만든 철학
704년 무렵 신라에서 났다. 열여섯 안팎에 당으로 건너가 광주에서 남천축 출신 승려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웠고, 723년 무렵 배를 타고 인도로 향한다 — 스승이 온 길을 거꾸로 되짚는 항해였다. 동천축에 내려 마하보리사, 구시나, 녹야원의 성지를 돌고 중천축·남천축·서천축·북천축을 거쳐 가섭미라와 건타라에 이른 뒤, 토화라에서 파미르를 넘어 727년 11월 당의 서역 관문 안서에 닿는다. 4년이었다. 그가 적은 것은 왕의 코끼리 수, 형벌 제도, 기후, 옷차림, 그리고 매번 되풀이되는 한 문장 — 이 나라 사람들이 삼보를 공경하는가. 성지가 폐허가 되어 있으면 폐허라고 적었고, 불교가 없는 나라는 없다고 적었다. 대식(아랍)에 관한 그의 서술은 이슬람 세계를 다룬 가장 이른 동아시아 기록 가운데 하나다. 돌아온 뒤 그는 장안에서 밀교 경전을 다루었고 불공의 여섯 제자 가운데 하나로 꼽혔으며, 780년 오대산에서 경전을 정리하다 787년 무렵 그곳에서 죽었다. 예순 해 동안 신라로 가지 않았다. 세 권짜리 그의 여행기는 사라져 혜림의 어휘 사전에 제목과 낱말 몇 개만 남았고, 그 상태로 천 년이 흘렀다. 1908년 폴 펠리오가 둔황 막고굴의 봉해진 방에서 제목도 저자도 없는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227행, 약 6천 자. 1915년 다카쿠스 준지로가 혜림의 낱말 목록과 대조해 저자가 신라 승려 혜초임을 밝혔다. 사라진 본문이 남아 있던 목록을 만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두루마리는 지금 파리에 있고, 2010년 겨울 넉 달 동안만 서울에 왔다 갔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직접 본 것만 적는 기록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을 만났을 때, 어떻게 적어야 하는가?
- 믿음은 핏줄을 따라 흐르는가, 사람이 고르는가?
당신이 남긴 기록 가운데, 천 년 뒤 낯선 사람이 읽게 될 것은 어느 것일까요?
이 사람이 놓인 물음같은 물음 아래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 3개의 질문에서 이어집니다.
🐎 이 사람의 길을 루트로 따라가기
🗺 신앙과 이성 지도에서 이 인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