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 루트Art History Route

🖼️ 미술사 — 서양 미술사를 지도 위에서 읽다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끝내던 해 조선에서는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마네가 낙선전에서 비웃음을 사던 해에 고종이 왕위에 올랐으며,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내던 해에 이광수의 『무정』이 연재됐다. 조토의 파도바 예배당에서 뒤샹의 「샘」까지, 서양 미술의 결정적 순간 스물둘을 같은 해의 조선과 나란히 놓는다. 작품 사진은 저작권이 끝난 것만 그대로 싣고, 그림마다 「어디를 보면 되는지」를 적었다.The year Leonardo finished the Last Supper, Joseon purged its scholars; the year Manet was laughed at in the Salon des Refusés, Gojong took the throne; the year Duchamp sent a urinal to an exhibition, Korea’s first modern novel was serialised. Twenty decisive moments in Western art, from Giotto’s chapel in Padua to Duchamp’s Fountain, set beside the Korean year that shared them — with the paintings themselves, and a note on what to look for in each.

📖 읽기 전에 — 그림 보는 법 기초📖 Before you begin — how to look at a painting

미술관에서 그림 앞에 서면 대개 8초쯤 보고 지나갑니다. 그림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어디를 봐야 하는지 몰라서입니다. 이 루트는 정거장마다 「무엇이 보이나」 층을 두어 그 자리를 짚어 줍니다. 그 전에 네 가지만 알고 가면 됩니다.Most people spend about eight seconds in front of a painting. Not because it is dull, but because nobody told them where to look. Every stop on this route has a “what to look for” layer. Four things before you start.

① 무엇으로 그렸나 — 프레스코, 템페라, 유화

【프레스코】 젖은 회벽에 물감을 바릅니다. 벽이 마르면서 물감을 붙잡으니 오래가지만, 마르기 전 하루치만 칠할 수 있고 고칠 수도 없습니다. 조토·마사초·미켈란젤로가 이것입니다.

【템페라】 안료를 달걀노른자에 개어 나무판에 칠합니다. 빨리 마르고 색이 또렷하지만 부드럽게 섞기가 어렵습니다. 보티첼리까지의 이탈리아가 대개 이것입니다.

【유화】 안료를 기름에 갭니다. 천천히 마르니 색을 섞고 겹치고 고칠 수 있고, 얇게 겹친 층이 빛을 통과시켜 깊이가 납니다. 반 에이크가 완성했고 그 뒤 500년의 서양 회화가 이것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그렇게 빨리 망가진 것도 이 차이 때문입니다. 벽에 프레스코를 쓰지 않고 마른 벽에 템페라를 칠했습니다.

② 원근법 한 줄

평행한 선들은 멀어질수록 한 점으로 모입니다. 그 점(소실점)을 화가가 어디에 두느냐가 관람자를 어디에 세우느냐를 정합니다. 마사초는 그 점을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 두었고, 레오나르도는 예수의 관자놀이에 두었습니다. 그림을 보실 때 「이 그림이 나를 어디에 세우려 하는가」를 한 번 물어보십시오.

③ 살롱과 아카데미 — 3장부터 5장까지의 배경

17세기 프랑스가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를 세우고, 그 아카데미가 여는 전시회가 「살롱」입니다. 19세기에는 여기 걸리느냐가 화가의 생계를 갈랐습니다. 심사위원이 있었고, 역사화가 최고이고 풍경·정물은 아래라는 서열이 있었으며, 마무리가 매끈해야 했습니다. 쿠르베·마네·모네 이야기는 전부 이 심사에 떨어지거나 맞서는 이야기입니다.

④ 그림 앞에서 3분

첫 1분은 아무 정보 없이 봅니다. 빛이 어디서 오는가, 내 눈이 어디로 먼저 가는가, 그림 속 사람이 나를 보는가.

다음 1분은 크기를 봅니다. 실물 크기를 확인하십시오.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가로 3미터가 넘고 「진주 귀걸이」는 잡지 한 권만 합니다. 크기는 화가가 정한 첫 번째 말입니다.

마지막 1분에 제목과 해설을 읽습니다. 순서를 바꾸면 해설이 그림을 대신해 버립니다.

① What it is painted with

Fresco: pigment on wet plaster. The wall grips the paint as it dries, so it lasts, but you can paint only a day’s patch at a time and cannot correct it. Giotto, Masaccio, Michelangelo.

Tempera: pigment bound with egg yolk on a wooden panel. Dries fast, colours crisp, hard to blend. Most of Italy up to Botticelli.

Oil: pigment bound with oil. Dries slowly, so you can blend, layer and correct, and thin layers let light pass through for depth. Van Eyck perfected it; the next five centuries of Western painting are oil.

This is why Leonardo’s Last Supper decayed so fast — he painted on a dry wall instead of in true fresco.

② Perspective in one line

Parallel lines converge toward a single point as they recede. Where the painter puts that point decides where you stand. Masaccio put it at a standing viewer’s eye level; Leonardo put it at Christ’s temple. Ask of any painting: where is it trying to place me?

③ The Salon and the Academy

Seventeenth-century France founded a Royal Academy of Painting, and the Academy’s exhibition was the Salon. By the nineteenth century, getting hung there decided whether a painter ate. There was a jury, a hierarchy (history painting on top, landscape and still life below), and a demand for smooth finish. The stories of Courbet, Manet and Monet are all stories of failing or fighting that jury.

④ Three minutes in front of a painting

First minute: look with no information. Where does the light come from, where does your eye go first, does anyone in the picture look back at you?

Second minute: check the real size. Liberty Leading the People is over three metres wide; the Girl with a Pearl Earring is the size of a magazine. Size is the painter’s first sentence.

Third minute: read the title and the label. Do it the other way round and the label replaces the painting.

신을 그리다가 사람을 그리다 1305 ~ 1512

중세의 그림은 읽는 것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을 보여 주는 도구였고, 인물은 납작했고 금색 바탕 위에 떠 있었다. 이 장은 그 인물이 무게를 얻고, 발을 땅에 딛고, 뒤를 돌아보고, 마침내 신이 사람의 몸으로 그려지기까지의 200년이다.

1305 — 그림 속 사람이 등을 돌리다

파도바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파도바의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는 아버지가 남긴 돈이 부끄러웠다. 아버지 레지날도는 고리대금업자였고, 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스크로베니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돈주머니를 목에 건 채 불비를 맞는 고리대금업자를 그 자리에 세웠다. 아들은 옛 로마 원형경기장 터에 예배당을 짓고, 피렌체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한 화가 조토를 불러 벽 전체를 맡겼다. 1303년에서 1305년 사이의 일이다.

누구였나 조토 디 본도네(1267년경~1337). 피렌체 근처 시골 출신으로, 스승은 치마부에라고 전한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1550)에는 양치기 소년 조토가 바위에 양을 그리는 것을 치마부에가 보고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교황 사절이 견본을 청하자 붓 하나로 완벽한 원(O)을 그려 보냈다는 이야기도 바사리의 것이다.

원문 · 출처 「치마부에가 그림에서 으뜸이라 여겨졌으나, 지금은 조토가 그 이름을 얻어 그의 명성은 빛을 잃었다.」 — 단테, 『신곡』 연옥편 11곡. 단테와 조토는 동시대인이었고, 단테는 이 예배당 벽화를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예배당 봉헌은 1305년 3월 25일이다.

쉽게 말하면 중세 성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금색 배경, 정면을 보는 성인, 종이처럼 얇은 몸. 그것은 초상이 아니라 표지판이었습니다. 「여기 성모가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면 충분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그리스도를 애도함」에서 먼저 바위의 비탈을 보십시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흘러내리는 선이 관람자의 눈을 예수와 마리아의 얼굴로 끌고 갑니다. 그림 전체가 그 두 얼굴을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조토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위층의 벽화 연작(1290년대)이 정말 그의 것인가는 100년 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학자들은 대체로 조토로 보고, 영국·독일 학자들은 다른 화가 여럿의 작업으로 본다. 파도바는 논란이 없다. 그래서 「확실한 조토」의 기준점이 이 예배당이다.

가려진 사람 두초 디 부오닌세냐. 같은 몇 해 동안 시에나에서 대성당의 거대한 제단화 「마에스타」(1308~1311)를 그렸다. 완성된 날 시에나 시민 전체가 종을 울리며 행렬을 지어 성당까지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조토가 몸과 공간을 열었다면 두초는 선과 색과 서사를 극한까지 밀었다. 그러나 미술사는 「피렌체가 이겼다」고 쓰였고, 시에나는 조연이 됐다. 「마에스타」는 1771년에 톱으로 잘려 여러 조각이 세계 미술관에 흩어져 있다.

🖼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4~1306) — 프레스코, 200×185cm · 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그때 조선은 고려 충렬왕 말년. 안향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주자학이 막 뿌리를 내리던 때다(안향은 이듬해 1306년에 죽는다). 고려는 몽골의 간섭 아래 있었다.

그림 속 사람이 우리에게 등을 돌릴 때, 우리는 무엇을 더 보게 되는가.

1427 — 벽에 구멍을 뚫다

피렌체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왼쪽 벽에 스물여섯 살의 화가가 벽화를 그렸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 뒤에 성부, 양옆에 마리아와 요한, 그 아래 무릎 꿇은 기부자 부부. 여기까지는 흔한 주제다. 흔하지 않은 것은 그 뒤다. 예수 뒤로 둥근 천장을 얹은 방이 벽 속으로 깊이 뚫려 있다. 사람들이 이 앞에 서면 벽에 진짜 방이 생긴 줄 알았다.

누구였나 마사초(1401~1428). 본명은 톰마소, 「마사초」는 「덜렁이 톰」쯤 되는 별명이다. 바사리는 그가 옷차림에도 돈에도 무관심했고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서 그렇게 불렸다고 적었다. 화가 조합에 등록한 것이 1422년, 죽은 것이 1428년. 화가로 활동한 기간이 여섯 해다.

원문 · 출처 「나는 먼저 종이 위에 원하는 크기의 직각 사각형을 그린다. 그것을 나는 내가 그리려는 것을 내다보는 열린 창으로 여긴다.」 —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회화론』(1435). 브루넬레스키가 눈으로 보여 주고 마사초가 벽에 그린 규칙을, 알베르티가 8년 뒤 글로 정리했다. 「그림은 창이다」라는 서양 회화 500년의 전제가 이 문장에서 나왔다.

쉽게 말하면 기찻길 사진을 떠올려 보십시오. 두 레일은 실제로는 평행한데 사진에서는 멀리서 한 점으로 모입니다. 그 점을 종이 위 어디에 찍고 모든 선을 거기로 모으면, 평평한 종이에 깊이가 생깁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배우는 이 방법을 1420년대 피렌체 사람들이 처음 「발견」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이 벽 앞에서는 먼저 뒤로 물러서서 그림 아래쪽, 십자가 발치와 기부자 부부 사이 어딘가에 눈높이를 맞추십시오. 천장의 격자무늬 선들이 그 점으로 모여듭니다. 그 자리에 서면 방이 가장 깊어 보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천장의 건축을 브루넬레스키가 직접 그려 주었는가. 격자 천장과 기둥이 그의 건축과 너무 닮아서 오래된 가설이지만 증거는 없다. 무릎 꿇은 기부자 부부가 누구인가도 확정되지 않았다. 렌치 가문이라는 설과 베르티 가문이라는 설이 맞선다.

가려진 사람 마솔리노. 마사초와 브란카치 예배당을 나눠 그린 동업자이자 스무 살 위 선배였다. 같은 벽에 두 사람의 그림이 나란히 있는데, 마솔리노의 아담과 이브는 우아하고 마사초의 아담과 이브는 울부짖는다. 후대는 둘을 비교하며 마솔리노를 「옛 사람」으로 밀어냈다. 그는 마사초가 죽은 뒤 15년을 더 살며 헝가리와 롬바르디아에서 그렸지만, 그 이름은 늘 「마사초의 동료」로만 불린다.

🖼 삼위일체 (1427년경) — 프레스코, 667×317cm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그때 조선은 세종 9년. 세종이 박연에게 궁중 음악(아악)을 바로잡게 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자라던 때다. 훈민정음은 아직 16년 뒤의 일이다.

「그림은 창이다」라는 약속이 500년 뒤에 깨질 때(5장),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

1434 —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브뤼헤 (벨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브뤼헤의 어느 방. 초록 옷의 여자와 검은 모자의 남자가 손을 잡고 서 있다. 창가에 오렌지 몇 개, 바닥에 벗어 둔 나막신, 발치에 작은 개, 천장에 초 하나만 켜진 샹들리에. 그리고 두 사람 뒤 벽 한가운데 볼록거울이 걸려 있다. 거울 속에 방이 거꾸로 비치고, 부부의 등 너머로 문가에 두 사람이 더 서 있다. 그 거울 위에 라틴어로 글씨가 적혀 있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1434.」

누구였나 얀 반 에이크(1390년경~1441).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궁정화가였고, 공작은 그를 비밀 외교 임무에도 보냈다. 1428년에는 포르투갈로 가서 공작의 신붓감 이사벨라의 초상을 그려 보냈다. 화가가 사진사 노릇을 한 것이다. 공작은 그의 봉급을 회계관들이 깎으려 하자 「그만한 화가는 어디에도 없다」며 직접 막았다.

원문 · 출처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 — 그림 속 거울 위, 벽에 적힌 서명.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흔한 서명 형식인 「반 에이크가 그렸다(fecit)」가 아니라 「여기 있었다(fuit hic)」다. 이 한 단어 차이에서 「화가가 결혼의 증인이었다」는 유명한 해석(파노프스키, 1934)이 나왔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은 실물이 작습니다. 세로 82센티미터. 그런데 가까이 가면 오렌지 껍질의 점, 개의 털 한 올, 거울 테두리의 동전만 한 그림 열 개(예수의 수난 장면)까지 보입니다. 유화가 처음으로 보여 준 것이 이것입니다 — 「세상에는 무한히 작은 것이 있고 그것을 다 그릴 수 있다」는 약속.

무엇이 보이나 먼저 거울을 보십시오. 방 전체가 거꾸로 비치고, 부부 너머 문가에 파란 옷과 빨간 옷의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위의 서명과 합치면 「그중 하나가 화가」라는 뜻이 됩니다. 거울 테두리의 작은 원 열 개는 예수의 수난 장면입니다. 왼쪽(남자 쪽)은 살아 있을 때, 오른쪽(여자 쪽)은 죽은 뒤 장면입니다 — 이 배치가 뒷날 「여자는 이미 죽었다」는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1934년 파노프스키는 이 그림을 「결혼의 증서」로 읽었다 — 촛불은 성령, 개는 정절, 서명은 증인. 60년 동안 정설이었다가 1990년대에 흔들렸다. 남자는 오래 「조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로 알려졌으나 그가 결혼한 것은 1447년, 그림보다 13년 뒤이고 반 에이크가 죽은 뒤다. 지금은 사촌 「조반니 디 니콜라오」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고, 여자는 그의 첫 아내 코스탄차라는 설이 있는데 그녀는 1433년에 죽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혼 그림이 아니라 죽은 아내를 기리는 그림이다. 확정된 것은 없다.

가려진 사람 후베르트 반 에이크. 얀의 형이고, 헨트 제단화를 시작한 사람이다. 제단화 액자에 적힌 시는 후베르트를 「그보다 위대한 사람은 없었다」고 하고 얀을 「기술에서 두 번째」라고 한다. 그런데 후베르트의 것으로 확인된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가 정말 형이었는지, 실존 인물인지까지 의심하는 학자도 있었다. 지금은 실존은 인정되지만, 제단화의 어디까지가 형의 붓인지는 알 수 없다. 이름은 남고 손은 사라진 사람이다.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 — 오크 패널에 유채, 82×60cm · 내셔널 갤러리, 런던

그때 조선은 세종 16년. 갑인자를 주조해 인쇄술을 한 단계 올리고, 해시계 앙부일구를 종로에 설치해 백성이 시각을 읽게 한 해다. 물시계 자격루도 이해에 완성됐다.

화가가 「내가 그렸다」 대신 「내가 여기 있었다」고 쓸 때, 그림은 작품인가 증언인가.

1485 — 천 년 만에 돌아온 여신

피렌체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거대한 조개껍데기 위에 여자가 벌거벗고 서 있다. 왼쪽에서 바람의 신이 그녀를 뭍으로 불어 보내고, 오른쪽에서 봄의 여신이 꽃무늬 망토를 들고 마중한다. 기독교가 유럽을 덮은 뒤 천 년 동안 이런 그림은 없었다. 벌거벗은 여자가, 성경의 이브가 아니라 그리스의 여신으로,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그려진 것은 이때가 처음에 가깝다.

누구였나 산드로 보티첼리(1445년경~1510).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란 뜻으로 형의 별명이 옮겨 붙은 것이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받아 1481년에는 로마로 불려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천장이 아니라 벽)을 그렸다.

원문 · 출처 「흰 거품에서 태어난 처녀가 조개껍데기에 실려 뭍에 오르는 것을 그대는 보리라 … 그녀의 얼굴은 신들도 기뻐하게 하리라.」 — 안젤로 폴리치아노, 『마상시합의 노래』(1475~78년경). 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를 위해 쓴 시로, 보티첼리의 그림과 세부가 겹친다. 바람의 신, 꽃을 든 여신, 물결 위의 조개가 모두 시에 있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의 눈으로 보십시오. 지금까지 성당에서 본 여자는 옷을 입은 성모뿐입니다. 벌거벗은 여자는 이브였고, 이브는 부끄러워 몸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여자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손으로 가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고대 조각의 자세(「정숙한 비너스」)를 따라 한 것이지 죄책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목과 어깨를 보십시오. 목이 너무 길고, 왼쪽 어깨는 이상하게 처져 있으며, 왼팔은 몸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틀렸습니다. 보티첼리는 알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정확한 몸이 아니라 흐르는 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의 곡선과 몸의 곡선이 같은 리듬으로 이어지는지 보십시오.

아직도 논란인 것 모델이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이야기는 널리 퍼졌으나 근거가 없다. 그녀는 피렌체 제일의 미인으로 1476년에 스물둘로 죽었고, 그림은 그로부터 10년 뒤다. 보티첼리가 그녀 발치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바사리의 기록이 이 전설을 키웠다. 그림의 뜻도 갈린다. 피치노식 신플라톤주의(「육체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의 아름다움으로」)의 도상인가, 아니면 별장을 꾸미는 우아한 장식화인가. 누가 주문했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가려진 사람 보티첼리 자신이 그렇다. 죽은 뒤 300년 넘게 그는 「라파엘로 이전의 서툰 화가」였다. 이 그림이 우피치에 걸린 것은 1815년이고, 그 뒤로도 한동안 창고 취급이었다. 1870년대 영국의 비평가 페이터와 러스킨이 그를 다시 읽고,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그의 선을 흉내 내면서 오늘의 명성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르네상스의 대표작」이라고 부르는 그림은 150년 전에 발견된 그림이다.

🖼 비너스의 탄생 (1484~1486년경) — 캔버스에 템페라, 172×278cm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그때 조선은 성종 16년.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시행된 해다. 세조 때 시작해 30년 가까이 다듬은 끝이었다.

틀린 몸이 맞는 몸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가.

1498 —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밀라노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벽. 수도사들이 밥을 먹는 방 끝에 예수와 열두 제자가 밥을 먹는다. 레오나르도는 이 벽을 1495년에 시작해 1498년에 끝냈다. 주문한 사람은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다.

누구였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공증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라틴어를 어른이 되어 혼자 익혔다. 왼손잡이로 글씨를 거꾸로 썼다. 남긴 공책이 7천 쪽이 넘는데 완성한 그림은 스무 점이 안 된다. 그는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문 · 출처 「그는 새벽에 올라와 해 질 녘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잊었다. 그러다 사흘 나흘 손도 대지 않고 한두 시간씩 팔짱을 낀 채 인물들을 뜯어보곤 했다.」 — 마테오 반델로, 『노벨레』 58화(1554). 반델로는 이 수도원에 살던 삼촌 밑에서 자랐고, 열 몇 살에 작업 중인 레오나르도를 보았다. 이 그림에 대한 유일한 목격담이다.

쉽게 말하면 열세 사람이 한 탁자에 앉은 그림을 수백 장 그린다고 해 보십시오. 대부분은 줄줄이 앉은 정물 같은 그림이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한 일은 「말이 떨어진 직후의 1초」를 고른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이 정지 화면이 아니라 파문이 됩니다. 예수는 가만히 있고 파문이 양쪽으로 퍼집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예수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눈을 두십시오. 천장의 격자, 벽의 태피스트리 선, 탁자 모서리가 전부 그 한 점으로 모입니다. 그림의 모든 선이 예수의 머리를 가리키고, 뒤쪽 창의 밝은 하늘이 후광 노릇을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후광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예수 오른편(그림에서는 왼편)의 인물이 사도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주장은 소설 『다빈치 코드』(2003)로 퍼졌으나, 젊은 요한을 수염 없는 미청년으로 그리는 것은 당시 관행이며 미술사학계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짜 논란은 복원이다. 21년의 복원이 후대 덧칠을 걷어 낸 것은 맞지만, 남은 원작이 20퍼센트도 안 된다는 추정도 있어 「지금 보는 것이 레오나르도인가」는 열려 있다.

가려진 사람 조반니 도나토 다 몬토르파노. 같은 식당 맞은편 벽에 「십자가 처형」을 그린 화가다. 1495년에 진짜 프레스코로 그렸고, 그래서 500년 뒤에도 멀쩡하다. 레오나르도의 벽이 부서지는 동안 그의 벽은 서 있었다. 그런데 관람객은 그의 벽에 등을 돌리고 레오나르도의 얼룩을 본다. 옳은 방법으로 그린 사람이 잊히고, 틀린 방법으로 그린 사람이 남았다.

🖼 최후의 만찬 (1495~1498) — 마른 회벽에 템페라·유채, 460×880cm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밀라노

그때 조선은 연산군 4년.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사림이 대거 처형·유배된 무오사화가 일어난 해다.

고치고 싶어서 오래가지 않는 방법을 고른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1512 — 조각가가 천장을 그리다

로마 (바티칸)

무슨 일이 있었나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을 새로 그리라고 미켈란젤로에게 명했다. 미켈란젤로는 싫다고 했다. 자기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고, 이것은 자기 무덤 조각을 맡기지 않으려는 경쟁자 브라만테의 계략이라고 했다. 교황은 듣지 않았다. 천장은 1512년 10월 31일, 만성절 전야에 공개됐다.

누구였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피렌체 몰락 귀족의 아들로, 아버지는 아들이 돌 다루는 직인이 되는 것을 창피해했다. 열세 살에 화가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갔고, 메디치 가문의 조각 정원에서 자랐다. 스물넷에 「피에타」, 스물아홉에 「다비드」. 이 천장을 맡은 것은 서른셋이다.

원문 · 출처 「이 감옥에서 갑상선종이 생겼다 … 수염은 하늘을 향하고 뒤통수는 등뼈에 닿고 가슴은 하르피아처럼 휘고, 붓에서 떨어지는 물감이 얼굴에 온갖 무늬를 만든다 … 나는 화가가 아니다.」 — 미켈란젤로가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에게 보낸 소네트(1509~10년경). 원고 여백에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그리는 자기 모습을 낙서해 두었다. 이 낙서가 「서서 그렸다」는 증거다.

쉽게 말하면 이 천장이 서양 미술에 남긴 것은 「몸」입니다. 마사초가 인물을 땅에 세우고 보티첼리가 다시 띄웠다면, 미켈란젤로는 인물의 근육 하나하나를 조각처럼 그렸습니다. 그림 속 사람들이 대리석 같은 이유입니다. 신조차 근육질 노인입니다. 신을 사람의 몸으로 그린 것 — 이것이 1장 제목의 뜻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아담의 창조」에서 먼저 두 몸을 비교하십시오. 신은 날아오고 아담은 누워 있습니다. 신의 팔은 곧고 아담의 팔은 팔꿈치에 걸려 있습니다. 신은 힘이고 아담은 아직 힘이 없습니다. 몇 센티미터 뒤에 그 힘이 넘어갑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1980~1994년의 복원이 옳았는가. 청소는 500년 묵은 그을음과 아교를 걷어 내고 파스텔처럼 밝은 색을 드러냈다. 비판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마른 벽에 덧칠로 넣은 그림자까지 같이 지워 버려 그림이 「평평해졌다」고 주장한다. 반론은 그 덧칠이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후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담의 창조」의 신을 감싼 천이 인간의 뇌 단면 모양이라는 주장(1990, 미국 의사 메시버거)은 널리 인용되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가려진 사람 피에르마테오 다멜리아. 미켈란젤로가 오기 전, 이 천장에는 그가 그린 파란 하늘과 금색 별이 있었다. 1481년경의 일이다. 율리우스 2세가 그 위를 덮으라고 명했고, 그의 별 하늘은 미켈란젤로의 발판 아래서 긁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가 그린 별 하늘의 밑그림 한 장(우피치)과, 「미켈란젤로 이전에 그 천장에 뭔가 있었다」는 한 줄이다.

🖼 아담의 창조 (1508~1512) — 프레스코, 280×570cm ·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그때 조선은 중종 7년. 삼포왜란(1510)으로 끊겼던 일본과의 교역을 조건을 줄여 다시 여는 임신약조를 맺은 해다.

닿지 않은 손가락이 닿은 손가락보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빛과 권력 — 바로크 1600 ~ 1665

이 장의 그림들을 뒷날 사람들은 「바로크」라 불렀다. 어긋난 진주라는 뜻의 말로, 처음에는 「지나치다」는 흉이었다. 종교개혁으로 갈라진 유럽에서 그림은 무기가 된다. 로마의 교회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빛으로 신자를 붙잡고, 개신교 네덜란드의 시민은 자기 얼굴을 걸고, 스페인의 궁정화가는 왕 앞에서 자기 자신을 그린다. 그리고 한 도시의 무명 화가가 빛 자체를 그린다.

1600 — 어둠 속에서 손가락 하나가 나오다

로마 (이탈리아)

무슨 일이 있었나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작은 예배당. 스물여덟 살의 화가가 첫 공공 주문을 받았다. 세리(稅吏) 마태오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장면. 그는 성경 속 팔레스타인을 그리지 않았다. 로마의 어느 지하 술집 같은 방, 깃털 모자를 쓴 로마의 건달들이 탁자에서 돈을 세고 있다. 오른쪽 어둠에서 예수가 들어와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킨다. 창문에서 비스듬히 떨어지는 빛이 그 손가락을 따라간다.

누구였나 미켈란젤로 메리시(1571~1610), 밀라노 근처 카라바조 마을 출신이라 카라바조라 불린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캔버스에 바로 그렸고, 모델을 세워 놓고 그렸다. 밤에는 칼을 차고 로마 거리를 돌아다니다 싸움을 벌였다. 경찰 기록에 그의 이름이 십여 차례 나온다. 웨이터에게 아티초크 접시를 던진 일, 집주인 집 천장에 구멍을 낸 일.

원문 · 출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사물이 아닌 것을 모방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고, 자연이야말로 붓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 조반 피에트로 벨로리, 『현대 화가·조각가·건축가 열전』(1672). 벨로리는 카라바조를 싫어했다. 고대와 라파엘로의 이상을 버리고 「거리의 더러움」을 그렸다는 것이다. 미워하면서 남긴 이 한 줄이 카라바조의 선언문처럼 읽힌다.

쉽게 말하면 연극 무대를 떠올려 보십시오. 무대 전체를 밝히던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 하나만 켜집니다. 배우 한 사람의 얼굴과 손만 보이고 나머지는 검습니다. 카라바조가 회화에 한 일이 그것입니다. 「어디를 보라」고 빛으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성 마태오의 소명」 앞에서 먼저 빛을 찾으십시오. 오른쪽 위에서 비스듬히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림 속 창문은 닫혀 있고 빛은 창에서 오지 않습니다. 빛의 출처는 그림 밖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마태오는 누구인가. 수염 난 남자(전통적 해석)인가, 돈을 세느라 고개 숙인 젊은이(1980년대 이후 유력해진 해석)인가. 카라바조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또 하나, 그의 죽음이다. 열병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살해설, 납 중독설(2010년 유골 분석에서 높은 납 수치 검출)이 있다. 2010년에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발견됐으나 확정은 아니다.

가려진 사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카라바조의 친구였던 화가 오라치오의 딸로, 아버지의 공방에서 카라바조 방식을 배웠다. 열일곱에 아버지의 동료 화가에게 강간당했고, 1612년 재판에서 진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손가락을 죄는 고문을 받으며 증언했다. 그 뒤 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카라바조의 어떤 그림보다 잔혹하고 힘차다. 300년 동안 「오라치오의 딸」로 불리다 1970년대 여성 미술사가들이 그녀를 되찾았다.

🖼 성 마태오의 소명 (1599~1600) — 캔버스에 유채, 322×340cm ·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콘타렐리 예배당, 로마

그때 조선은 선조 33년. 임진왜란이 끝난 지 두 해, 허준이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을 쓰고 있던 때다(1610년 완성).

성인의 얼굴로 옆집 사람의 얼굴을 쓸 때, 성인이 내려오는가 이웃이 올라가는가.

1642 — 단체 사진이 연극이 되다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무슨 일이 있었나 암스테르담의 민병대 조직들은 회관에 걸 단체 초상화를 주문하는 관습이 있었다. 대원들이 돈을 갹출하고, 화가는 낸 돈만큼 얼굴을 잘 보이게 그렸다. 줄지어 서서 관람자를 보는 그림. 사진이 없던 시대의 단체 사진이다.

누구였나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1606~1669). 레이던 방앗간집 아들로 스무 살에 이미 유명했고, 스물다섯에 암스테르담으로 와서 초상화로 돈을 쓸어 담았다. 부유한 집 딸 사스키아와 결혼하고 큰 집을 샀다. 「야경」을 그리던 1642년 6월, 사스키아가 서른에 죽었다. 넷 낳은 아이 중 하나(티투스)만 살아 있었다.

원문 · 출처 「젊은 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 공이 부관 빌럼 판 라위텐뷔르흐 공에게 자기 시민 중대의 행진을 명하다.」 — 반닝 코크 가문의 앨범에 붙은 이 그림의 수채 모사본 아래 적힌 설명(1650년경). 이 그림에 「야경」이라는 이름이 붙기 훨씬 전, 주문한 사람 자신이 그림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 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밤이라는 말은 없다.

쉽게 말하면 학교 졸업 사진을 떠올려 보십시오. 모두 줄 서서 카메라를 봅니다. 렘브란트가 받은 주문이 그것입니다. 그가 준 것은 졸업식 도중을 몰래 찍은 스냅 사진입니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신발 끈을 매고 누구는 가려져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크기입니다. 세로 3.6미터, 가로 4.4미터. 잘리기 전에는 더 컸습니다. 사람이 실물 크기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야경」이 그의 몰락을 불렀다는 신화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부정된다. 남은 논란은 세부다. 노란 옷 소녀는 누구를 모델로 했는가. 눈 하나만 보이는 인물이 렘브란트인가. 2019년부터 레이크스 미술관은 「야경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공개 현장에서 복원하고 있고, 2021년에는 잘려 나간 가장자리를 인공지능으로 재구성해 임시로 덧붙였다. 「잘린 부분을 붙이는 것이 옳은가」도 논쟁이 됐다.

가려진 사람 유딧 레이스터르. 렘브란트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나 하를럼에서 활동한 여성 화가로, 1633년 화가 조합에 정식 가입했다(당시 드문 일). 활달한 웃는 얼굴, 촛불 아래 장면을 잘 그렸다. 결혼 뒤 그림이 줄었고 죽은 뒤 잊혔다. 그녀의 그림들은 200년 넘게 프란스 할스의 것으로 팔렸다. 1893년 루브르가 「할스 작품」을 사들여 살펴보다 그녀의 서명(별 모양 모노그램)을 발견하면서 되살아났다.

🖼 야경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민병대) (1642) — 캔버스에 유채, 363×437cm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그때 조선은 인조 20년. 병자호란(1637) 뒤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던 때다. 세자는 3년 뒤에야 돌아온다.

돈을 낸 사람이 원한 그림과 후대가 원한 그림이 다를 때, 화가는 누구를 위해 그려야 하는가.

1656 — 왕 앞에서 자기를 그리다

마드리드 (스페인)

무슨 일이 있었나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의 어느 방. 다섯 살 공주 마르가리타가 한가운데 서 있고, 시녀 둘이 무릎을 굽혀 시중을 든다. 난쟁이 둘, 큰 개, 뒤에 수녀와 시종, 열린 문 앞 계단에 남자 하나. 그리고 왼쪽에 커다란 캔버스 뒤에서 이쪽을 내다보는 화가.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그 뒤 벽의 거울에 두 사람이 흐릿하게 비친다. 왕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다.

누구였나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세비야에서 스물넷에 마드리드로 올라와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됐고, 죽을 때까지 37년을 왕 곁에서 살았다. 왕은 그를 화가로만 두지 않았다. 궁정 시종장, 왕의 방 관리인, 왕실 행사 총감독. 그림 그릴 시간이 줄어 남긴 그림이 120점쯤이다.

원문 · 출처 「이것이 그림이라기보다 진실이다.」 — 루카 조르다노가 이 그림을 보고 한 말로 전한다. 안토니오 팔로미노, 『회화 박물관과 광학의 척도』(1724). 팔로미노는 그림 속 인물 전원의 이름을 처음 기록했고,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그로부터 100년 뒤 프라도의 목록(1843)에서 붙었다. 원래 제목은 「펠리페 4세의 가족」이었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 사진을 찍는 장면을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떠올려 보십시오.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그리고 그 둘을 보는 우리. 벨라스케스는 그중 「찍히는 사람」 자리를 비워 두고 우리를 거기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 서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거울을 찾으십시오. 뒤쪽 벽 한가운데, 흐릿한 두 얼굴. 반 에이크의 거울(1장)이 150년 뒤에 여기 왔습니다. 다만 반 에이크는 화가를 거울에 넣었고, 벨라스케스는 왕을 거울에 넣고 화가를 앞에 세웠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거울에 비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리에 서 있는 왕과 왕비인가(전통적 해석), 아니면 화가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 위의 왕과 왕비 그림인가(1970년대 이후 광학적 분석으로 제기된 해석). 소실점을 계산하면 거울이 비추는 것은 캔버스 쪽이라는 주장이 있고, 그러면 왕과 왕비는 「우리 자리」에 없다. 그림의 뜻이 통째로 바뀌는 문제라 아직 결론이 없다.

가려진 사람 후안 데 파레하.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물려받은 노예로, 물감을 개고 캔버스를 준비하며 20년을 곁에서 일했다. 1650년 로마에서 벨라스케스는 그의 초상을 그려 전시했고(뉴욕 메트로폴리탄), 같은 해 그를 해방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파레하는 그 뒤 화가로 독립해 마드리드에서 활동했다. 그의 그림 「마태오의 소명」(1661, 프라도)에는 왼쪽 끝에 자기 얼굴이 그려져 있다 — 스승이 「시녀들」에서 한 것처럼.

🖼 시녀들 (1656) — 캔버스에 유채, 318×276cm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그때 조선은 효종 7년. 제주에 표류한 하멜 일행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때다(1653~1666). 하멜은 13년 뒤 탈출해 조선을 서양에 처음 알리는 책을 쓴다.

그림이 나를 보고 있다면, 보고 있는 것은 그림인가 화가인가.

1665 — 흰 점 두 개로 진주를 만들다

델프트 (네덜란드)

무슨 일이 있었나 델프트라는 작은 도시에 여관집 아들 화가가 살았다. 아내와 열다섯 아이(열한 명이 살아남았다), 장모의 집에서 세 들어 살았다. 1년에 두세 점을 그렸고, 주로 한 사람(이웃 반 라위번)이 사 갔다. 1672년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해 미술 시장이 무너지자 빚에 몰렸고, 1675년 마흔셋에 이틀 앓다 죽었다. 아내는 「그림이 안 팔려 괴로워하다 하루 만에 미친 듯이 죽었다」고 파산 신청서에 썼다.

누구였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 아버지는 여관과 미술상을 겸했다. 1653년 스물한 살에 화가 조합에 가입했는데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른다. 같은 해 가톨릭 집안 딸 카타리나와 결혼하려고 개신교에서 개종했다(추정). 조합의 이사를 두 번 지냈으니 동네에서는 인정받은 화가였다.

원문 · 출처 「트로니 한 점, 터키풍으로.」 — 1676년 페르메이르 사후 재산 목록에 적힌 항목. 이것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림이 초상이 아니라 「트로니」였음을 보여 주는 기록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림에는 서명(IVMeer)만 있고 날짜가 없다. 1665년경으로 보는 것은 화풍에 따른 추정이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은 잡지 한 권 크기입니다. 세로 44센티미터. 미술관에 가면 그 앞에 사람이 열 겹으로 서 있어서 작다는 걸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진주입니다. 가까이 가서(또는 확대해서) 보십시오. 둥근 선이 없습니다. 위쪽에 흰 점 하나, 아래쪽에 옷깃이 비친 흐린 빛 하나. 두 번의 붓질입니다. 그리고 진주를 귀에 거는 고리가 없습니다. 진주는 공중에 떠 있습니다. 2018년 정밀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 이것은 진짜 진주가 아니라 「진주라는 생각」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옵스쿠라(어두운 상자에 렌즈로 상을 맺는 장치)를 써서 그렸는가.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흐릿한 빛 방울, 렌즈로 본 듯한 초점 차이가 근거로 제시된다. 2001년 화가 호크니는 서양 화가 다수가 광학 장치를 썼다고 주장했고, 2013년 다큐멘터리 「팀의 페르메이르」에서는 아마추어가 거울 장치로 그의 그림을 재현해 보였다. 반론은 「장치를 썼더라도 그림을 만드는 것은 장치가 아니다」이다. 페르메이르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가려진 사람 카렐 파브리티위스. 렘브란트의 제자로 델프트에 정착해 페르메이르의 스승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화가다. 1654년 10월 델프트 화약고가 폭발해 도시 4분의 1이 무너질 때 그의 작업실도 무너졌고, 그는 서른둘에 죽었다. 그림 대부분이 함께 사라져 열 몇 점만 남았다. 그중 하나가 「황금방울새」(1654)다. 델프트 화파의 첫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페르메이르가 시작했다.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경) — 캔버스에 유채, 44.5×39cm ·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그때 조선은 현종 6년. 효종의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맞선 예송 논쟁으로 조정이 갈라져 있던 때다. 첫 예송(1659)과 두 번째 예송(1674) 사이다.

윤곽 없이 점 두 개로 진주가 보인다면, 진주는 그림에 있는가 내 눈에 있는가.

그네와 장미 — 로코코 1717 ~ 1767

태양왕이 죽자 궁정은 파리의 작은 응접실로 옮겨 갔고, 그림은 작아지고 밝아지고 가벼워졌다. 신과 전쟁 대신 정원과 사랑과 놀이. 이 장은 그 반세기의 처음과 끝, 두 점이다. 하나는 슬픔이 섞인 사랑의 섬이고, 하나는 훔쳐보는 그네다. 그리고 이 그네가 다음 장의 혁명이 무엇을 끝내려 했는지를 보여 준다.

1717 — 아카데미가 이 그림 하나 때문에 새 이름을 만들다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717년 8월 28일, 파리 왕립 회화조각아카데미. 한 화가가 5년이나 미뤄 온 「입회 작품」을 마침내 냈다. 아카데미는 회원이 되려는 화가에게 정해진 주제로 그림 한 점을 요구했다. 역사화, 초상, 풍경, 정물 — 그림에는 등급이 있었고 맨 위가 역사화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신화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상도 아니었다. 비단옷을 입은 남녀 여덟 쌍이 가을 숲을 지나 바다로 내려간다. 배가 기다리고 아기 천사들이 하늘을 난다. 사랑의 여신이 태어난 섬 키테라로 가는 길이다.

누구였나 장앙투안 바토(1684~1721). 프랑스가 플랑드르에서 막 빼앗은 국경 도시 발랑시엔의 지붕장이 아들이다. 열여덟쯤 파리로 올라와 처음에는 종교화를 값싸게 베끼는 공방에서 일했다. 그 뒤 연극 배경을 그리던 화가 질로 밑에서 이탈리아 희극의 광대와 배우들을 알았고, 뤽상부르 궁을 관리하던 오드랑 밑에서 궁에 걸린 루벤스의 그림을 마음껏 보았다. 그의 그림에 배우와 정원과 루벤스의 색이 함께 있는 이유다.

원문 · 출처 「바토 씨는 그가 아카데미에 낸 작품을 들고 왔다. 키테라섬으로의 순례를 그린 것이다.」 — 왕립 회화조각아카데미 회의록, 1717년 8월 28일. 회의록에는 처음 「키테라섬으로의 순례」라 적혔다가 나중에 「페트 갈랑트」로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 널리 쓰는 제목 「키테라섬으로의 출항」은 후대에 붙은 것이다. 순례인지 출항인지, 가는 길인지 오는 길인지 — 제목의 흔들림이 곧 이 그림의 논쟁이다.

쉽게 말하면 왕이 죽고 나서 프랑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큰 궁전의 거대한 홀에서 예법대로 서 있던 사람들이 파리 시내의 작은 응접실로 옮겨 앉았습니다. 벽은 흰색과 금색, 거울과 조개 모양 장식. 거기 걸 그림은 작고 밝고 즐거워야 했습니다. 순교자의 처형을 응접실에 걸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이 보이나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십시오. 오른쪽 끝에 장미로 덮인 여신상이 있습니다. 비너스입니다. 그 아래 세 쌍이 차례로 있습니다. 첫 쌍은 남자가 여자에게 속삭이고, 둘째 쌍은 남자가 여자를 일으켜 세우고, 셋째 쌍은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합니다. 한 장면이 아니라 사랑의 세 단계를 옆으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들은 키테라로 가는가, 키테라에서 돌아오는가. 제목대로면 순례를 떠나는 참이다. 그러나 여신상에는 이미 장미가 바쳐졌고, 쌍들은 이미 맺어졌고, 한 여자는 뒤를 돌아본다. 사랑의 섬에서 이미 하루를 보내고 배에 오르는 저녁이라는 읽기다. 이렇게 읽으면 그림 전체가 「즐거움의 끝」에 관한 것이 된다. 그림은 답을 주지 않는다. 바토가 베를린을 위해 그린 두 번째 판(1718~19)은 배가 더 크고 사람도 더 많고 하늘도 더 밝다. 같은 장면을 두 번 그렸는데 두 번째는 덜 슬프다.

가려진 사람 장바티스트 파테르. 바토와 같은 발랑시엔 출신으로 그의 유일한 제자였다. 바토는 성격이 까다로워 그를 곧 내쫓았고, 죽기 전 마지막 몇 달에 다시 불러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쳤다. 바토가 죽자 파테르는 그의 그림을 평생 되풀이해 그렸다 — 같은 정원, 같은 비단옷, 같은 놀이. 시장은 만족했고 그는 부자로 죽었다. 다만 뒤돌아보는 여자는 없었다.

🖼 키테라섬으로의 순례 (1717) — 캔버스에 유채, 129×194cm · 루브르 박물관, 파리

그때 조선은 숙종 43년. 늙고 눈이 어두워진 숙종이 노론 대신 이이명을 홀로 불러 만난 「정유독대」의 해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직후 세자(뒷날 경종)에게 정사를 대신 맡기는 대리청정이 시작됐다. 파리에서 늙은 왕이 죽고 섭정이 시작된 지 2년, 한양에서는 늙은 왕이 아들에게 자리를 넘기는 중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림이 슬플 수 있다면, 그 슬픔은 어디에 있는가.

1767 — 「내가 그녀의 다리를 볼 수 있는 자리에 나를 그려 주시오」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767년, 파리. 성직자 재산을 관리하는 부유한 관리 생쥘리앵 남작이 화가 두아이앵을 찾아왔다. 주문은 이랬다. 「내 애인이 그네를 타고 주교가 그 그네를 밀어 주는 그림을 그려 주시오.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다운 아가씨의 다리를 볼 수 있는 자리에 놓아 주시오. 원한다면 더 잘 보이게 해도 좋소.」 두아이앵은 진지한 종교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그는 거절하고 대신 젊은 동료 프라고나르를 추천했다.

누구였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 남프랑스 향수의 도시 그라스에서 장갑 장인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 살에 파리로 왔다. 공증인 사무실 심부름꾼으로 일하다 그림 재주가 눈에 띄어 정물화가 샤르댕에게, 다시 궁정화가 부셰에게 보내졌다. 부셰는 퐁파두르 부인이 아끼던 화가, 로코코의 왕이었다. 프라고나르는 스승보다 빠르고 가벼운 붓을 가졌다. 로마에 유학했고, 돌아와 아카데미에 큰 역사화를 내 갈채를 받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역사화는 느리고 돈이 안 됐다. 그는 귀족의 방을 위한 작고 즐거운 그림으로 돌아섰고, 잘 팔렸다.

원문 · 출처 「나는 당신이 마담을 그네에 태우고, 주교가 그네를 밀어 주는 그림을 그려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그 아름다운 아이의 다리를 볼 수 있는 자리에 두어 주시오.」 — 극작가 샤를 콜레의 일기, 1767년 10월 2일. 콜레는 두아이앵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적었다. 그림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주문서이자, 이 그림이 「누가 보는가」에 관한 그림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은 야한 그림입니다. 그걸 모른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문한 사람이 원한 것이 그것이었고 화가도 알았습니다. 다만 프라고나르는 야한 것을 「우아하게」 만드는 법을 알았습니다. 다리는 스타킹 속에 있고, 신발은 날아가고, 큐피드가 「쉿」 합니다. 보여 주지 않으면서 다 말합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신발입니다. 왼발에서 벗겨져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네가 지금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고, 곧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그림이 한순간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신발 한 짝이 말해 줍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는 「귀족의 음란한 장난감」이다. 혁명 세대가 그렇게 보았고, 19세기 내내 로코코는 타락한 시대의 취향으로 취급됐다. 다른 하나는 「보는 것에 관한 그림」이다. 화가는 주문자의 욕망을 그대로 그리면서 그 욕망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훔쳐보는 남자, 알면서 신발을 차는 여자, 모르는 늙은이, 쉿 하는 큐피드 — 그리고 그 전부를 보고 있는 우리. 20세기 이후 미술사가들이 이 그림을 다시 꺼낸 이유다. 세 번째 읽기도 있다. 로코코는 퐁파두르 부인과 귀족 여성들이 후원한 시대였고, 그래서 로코코를 경박하다고 비웃은 말 속에는 「여자 취향」에 대한 경멸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가려진 사람 가브리엘프랑수아 두아이앵. 남작이 처음 찾아간 화가다. 그는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을 구하는 성 주느비에브 같은 거대한 종교화를 그리던 사람이었고, 주교가 그네를 미는 그림은 그릴 수 없었다. 거절하고 프라고나르의 이름을 댔다. 그 덕에 그네는 미술사에 남았고 두아이앵은 잊혔다. 혁명 뒤 그는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을 받아 페테르부르크로 갔고 거기서 죽었다. 자기가 그리지 않은 그림으로 기억되는 화가다.

🖼 그네 (1767년경) — 캔버스에 유채, 81×64cm · 월리스 컬렉션, 런던

그때 조선은 영조 43년. 영조가 몸소 밭을 갈고 정순왕후가 몸소 누에를 치는 친경례와 친잠례를 크게 치른 해다. 검소와 근면을 온 나라에 보이려는 늙은 왕의 의식이었다. 같은 해 파리에서는 애인이 그네 타는 그림을 주문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궁정이 백성에게 보여 주려 한 것이 이렇게 달랐다. 8년 뒤 이 왕의 손자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그림 속 남자는 훔쳐보고, 나는 그 남자를 본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혁명 앞의 붓 1793 ~ 1855

왕이 목이 잘리고 황제가 왔다 가고 다시 왕이 온다. 화가는 이제 누구 편인지를 그림으로 말해야 한다. 한 사람은 혁명가의 시체를 성자처럼 그렸고, 한 사람은 총살당하는 이름 없는 사람을 그렸고, 한 사람은 심사에 떨어지자 옆에 자기 전시장을 지었다.

1793 — 혁명가의 시체를 성자처럼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793년 7월 13일, 혁명 언론인 장폴 마라가 욕조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피부병 때문에 약물을 탄 욕조에 앉아 일을 보던 그에게 스물다섯 살의 샤를로트 코르데가 「반역자 명단을 알려 드리겠다」는 쪽지로 접근해 가슴을 찔렀다. 마라는 급진파 자코뱅의 상징이었고, 코르데는 온건파 지롱드 지지자였다.

누구였나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 파리에서 태어나 로마상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고대 조각을 배웠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로 혁명 전에 이미 「엄격한 고전」의 대표가 됐다. 혁명이 오자 자코뱅에 가담해 국민공회 의원이 됐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혁명 축제의 무대를 설계하고 국립 미술 아카데미를 해산시켰다.

원문 · 출처 「1793년 7월 13일. 마리안 샤를로트 코르데가 시민 마라에게. 제가 몹시 불행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 그림 속 마라가 왼손에 쥔 쪽지의 내용. 다비드가 지어낸 것이다. 코르데가 실제로 보낸 쪽지는 「반역자 명단」을 미끼로 한 것이었다. 다비드는 살인자를 동정을 구하는 여자로, 마라를 그 동정에 응하려다 죽은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쉽게 말하면 전에는 성당에 성인의 순교 그림이 걸렸습니다. 혁명은 성당을 닫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러러볼 그림은 무엇이 됩니까. 다비드의 답이 이것입니다 — 혁명가가 성인이고, 국민공회가 성당이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위쪽 절반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비드는 그 빈자리로 마라를 짓누르는 무게, 혹은 그를 비추는 빛을 만들었습니다. 빛은 왼쪽 위에서 옵니다 — 카라바조(2장)의 빛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이 그림의 원본은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있고, 다비드의 공방에서 만든 복제본이 루브르·베르사유·랭스·디종에 있다. 어느 것이 「다비드의 손」인지, 복제본에 그가 얼마나 손을 댔는지는 계속 논의된다. 더 큰 물음은 이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다. 정치 선전물인가, 예술인가, 둘 다인가. 마라는 공포정치의 선동가였고 코르데는 그를 「괴물」이라 불렀다. 그림은 그 논쟁을 지우고 순교자만 남겼다.

가려진 사람 아델라이드 라비유기아르. 혁명 전 왕립 아카데미에 여성으로는 드물게 정회원이 된 화가로, 「여성 회원은 넷까지」라는 정원 규정에 맞서 싸웠다. 1793년, 그녀가 5년을 들여 그린 대작 「생라자르 기사단 입단식」은 국왕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을 그렸다는 이유로 정부 명령에 따라 불태워졌다. 같은 해 다비드의 「마라」는 국가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같은 도시, 같은 해, 한 화가의 그림은 불에 타고 한 화가의 그림은 성당에 걸렸다.

🖼 마라의 죽음 (1793) — 캔버스에 유채, 165×128cm · 벨기에 왕립미술관, 브뤼셀

그때 조선은 정조 17년. 왕의 친위 부대 장용영을 확대해 수원 화성에 외영(外營)을 두고, 화성 건설을 본격화하던 해다. 정조의 개혁이 가장 힘차던 때다.

거짓 쪽지가 그려진 그림이 걸작일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1814 — 이름 없는 사람이 총살당하다

마드리드 (스페인)

무슨 일이 있었나 1808년 5월 2일, 나폴레옹 군대가 점령한 마드리드에서 시민들이 봉기했다. 3일 새벽, 프랑스군은 붙잡은 사람들을 시 외곽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총살했다. 고야는 그때 예순둘이었고 이미 20년 가까이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6년 동안 이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 점령군 왕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초상을 그렸다.

누구였나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아라곤 시골 도금공의 아들로 마드리드에 올라와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다 마흔 넘어 궁정화가가 됐다. 1792~93년 병을 앓고 귀가 멀었다. 그 뒤 그림이 바뀌었다. 밝은 축제 그림이 사라지고 마녀, 미치광이, 감옥, 전쟁이 왔다. 판화 연작 「변덕」(1799)으로 교회와 귀족을 비웃다 종교재판소의 눈에 들었다.

원문 · 출처 「나는 유럽의 폭군에 맞선 우리의 영광스러운 봉기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붓으로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뜨거운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 고야가 섭정 정부에 보낸 청원(1814년 2월 24일). 정부는 이 편지에 따라 재료비와 생활비를 지급했다. 그림은 편지와 다르게 나왔다.

쉽게 말하면 전쟁 그림은 그때까지 두 종류였습니다. 장군이 말을 타고 승리하는 그림, 아니면 영웅이 장렬하게 죽는 그림. 어느 쪽이든 「누가」 죽는지가 중요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빛을 찾으십시오. 땅에 놓인 각등 하나입니다. 그 빛이 흰 셔츠의 남자에게만 떨어집니다. 그는 그림에서 가장 밝고, 무릎을 꿇었는데도 다른 사람들보다 큽니다. 일어서면 군인들보다 클 것입니다. 고야가 일부러 몸을 키웠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고야는 이 장면을 직접 보았는가. 그의 하인이 「주인이 다음 날 새벽 언덕에 가서 시체를 그렸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후대의 것이다. 더 무거운 물음은 그의 정치다. 그는 프랑스 계몽사상에 공감한 「아프란세사도(친프랑스파)」에 가까웠고 점령군 왕에게 훈장까지 받았다. 그런 그가 왕정복고 뒤에 이 그림을 그렸다. 애국심인가, 신변 안전을 위한 증명서인가, 아니면 그 어느 편도 아닌 인간에 대한 고발인가. 그림은 답하지 않는다.

가려진 사람 총살당한 사람들 자신이다. 1808년 5월 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과 마드리드 곳곳에서 죽은 사람은 수백 명으로 추정되며, 이름이 전하는 이는 일부다. 고야는 그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고, 대신 흰 셔츠 하나를 주었다. 마드리드 시는 봉기 200주년인 2008년에 그림 속 언덕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림이 있어서 언덕이 기억됐고, 언덕이 기억되어 사람들이 기억됐다. 순서가 거꾸로다.

🖼 1808년 5월 3일 (1814) — 캔버스에 유채, 268×347cm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그때 조선은 순조 14년. 홍경래의 난(1811~12)이 진압된 지 두 해,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쓰던 때다(유배 1801~1818).

「영웅적 행동」을 그리겠다고 돈을 받고 도살을 그린 화가는 약속을 어긴 것인가 지킨 것인가.

1830 — 바리케이드 위의 여자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830년 7월 27일부터 사흘, 파리 시민이 왕 샤를 10세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영광의 3일」이다. 왕은 달아났고 사촌 루이 필리프가 「시민의 왕」으로 왕좌에 앉았다. 서른두 살의 들라크루아는 싸우지 않았다. 그해 10월 형에게 편지를 썼다. 「조국을 위해 싸우지 못했으니 적어도 조국을 위해 그리겠습니다.」

누구였나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아버지는 외교관이었고, 실은 정치가 탈레랑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평생 따라다녔다(증명된 바 없다). 스물넷에 「단테의 배」로 살롱에 데뷔했고, 스물여섯에 「키오스 섬의 학살」로 그리스 독립전쟁의 참상을 그려 논란을 일으켰다. 매끈한 선을 요구하는 아카데미의 앵그르와 평생 맞섰다. 「낭만주의」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본인은 그 말을 싫어했다.

원문 · 출처 「저는 현대적인 주제, 바리케이드를 시작했습니다 … 조국을 위해 싸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조국을 위해 그리겠습니다. 이것이 제 기분을 좋게 해 줍니다.」 — 들라크루아가 형 샤를앙리에게 보낸 편지(1830년 10월 28일). 「현대적인 주제」라는 말에 주목할 것. 신화도 성경도 아닌, 석 달 전 자기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역사화의 크기로 그리겠다는 선언이다.

쉽게 말하면 이 그림 속 여자는 프랑스 사람이면 다 압니다. 「마리안」이라 부르는 공화국의 상징입니다. 동전과 우표와 시청 앞에 있습니다. 그 얼굴이 대체로 이 그림에서 왔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구도를 보십시오. 삼각형입니다. 꼭짓점이 삼색기, 밑변이 시체들.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 산 사람 위에 깃발. 그리고 왼쪽 아래 시체는 바지가 벗겨져 있습니다. 죽은 뒤 약탈당한 것입니다. 들라크루아는 그것도 그렸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실크해트의 남자가 들라크루아 자신인가는 미술사가 대부분이 아니라고 보지만 안내서에는 여전히 그렇게 적힌다. 여자에게 실제 모델이 있었는가 — 세탁부 「마리 데샹」이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는 당시 기록이 있어 그녀를 모델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림의 정치. 왕정 아래서 그려 왕정이 샀는데 공화국의 상징이 됐다. 들라크루아 자신은 정치적으로 온건했고, 이 그림을 그린 뒤 다시는 이런 주제를 그리지 않았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 캔버스에 유채, 260×325cm · 루브르 박물관, 파리

그때 조선은 순조 30년. 세도정치 아래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가 스물둘에 갑자기 죽은 해다. 세자가 살았더라면 조선의 19세기가 달라졌으리라는 말이 오래 있었다.

겨드랑이털이 있는 여신은 여신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그 물음 자체가 낡은 것인가.

1855 — 심사에서 떨어지자 옆에 전시장을 짓다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세계에 자기를 보여 주는 자리였고, 미술전이 함께 열렸다. 서른여섯의 쿠르베는 열네 점을 냈다. 열한 점이 걸리고 가장 큰 두 점,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작업실」이 떨어졌다.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누구였나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프랑스 동부 국경 마을 오르낭의 부농 집 아들. 법학을 공부하러 파리에 왔다가 화가가 됐고, 루브르에서 베끼며 독학했다.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크고 자기 말로 「프랑스에서 가장 오만한 사람」이었다. 「천사를 보여 주면 천사를 그리겠다」는 말이 그의 것으로 전한다.

원문 · 출처 「누구의 제자도 아니었던 나는 … 내 시대의 풍속과 사상과 모습을 내 판단대로 옮길 수 있기를 원했다. 화가일 뿐 아니라 인간이기도 하기를, 한마디로 살아 있는 예술을 만들기를 — 이것이 내 목표다.」 — 쿠르베, 1855년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제목은 「리얼리즘」 한 단어다. 그는 이 이름이 남이 붙인 것이며 자기는 「리얼리즘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첫 줄에 적었다.

쉽게 말하면 그때까지 「큰 그림」은 큰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왕, 장군, 성인, 신화의 영웅. 농부와 장례식은 작은 그림에, 그것도 예쁘게 그려야 했습니다. 쿠르베는 시골 장례식을 왕의 대관식 크기로, 예쁘지 않게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화난 것은 장례식 때문이 아니라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오르낭의 매장」은 먼저 멀리서 보십시오. 가로로 긴 띠입니다.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뒤에 오르낭의 석회암 절벽이 같은 높이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줄과 절벽의 줄, 두 개의 수평선. 위로 솟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도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화가의 작업실」의 부제는 「내 7년 예술 인생을 요약하는 진정한 알레고리」인데, 「리얼리즘」을 내건 화가가 「알레고리」를 그렸다는 모순을 두고 지금까지 해석이 갈린다. 왼쪽 인물들 가운데 사냥꾼이 나폴레옹 3세를 밀렵꾼으로 그린 것이라는 해석(1970년대)이 유력하지만 확정은 아니다. 쿠르베가 정말 방돔 기념주 파괴를 주도했는가도 논란이다. 그는 「옮기자」고 했지 「부수자」고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가려진 사람 로자 보뇌르. 쿠르베와 같은 시대에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화가였고, 「니베르네의 밭갈이」(1849)는 국가가 사들여 지금 오르세에 있다. 남자 옷을 입고 다니기 위해 경찰의 「복장 허가증」을 받아야 했고, 소를 그리러 도살장에 드나들었다. 살아서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였는데, 20세기 미술사는 「동물 화가」로 줄여 적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이 새 미술의 시작이라면 그녀의 리얼리즘은 옛 미술의 끝으로 분류됐다. 같은 것을 그렸는데도.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 캔버스에 유채, 315×668cm ·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그때 조선은 철종 6년. 안동 김씨 세도가 절정이었고, 세금 제도(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이 무너지던 때다. 7년 뒤 진주 민란(1862)이 터지고, 5년 뒤 최제우가 동학을 연다(1860).

시골 장례식을 왕의 대관식 크기로 그리는 것은 장례식을 올리는 일인가 대관식을 끌어내리는 일인가.

눈이 규칙을 버리다 1863 ~ 1917

사진이 나왔다. 똑같이 그리는 일은 기계가 한다. 그러면 화가는 무엇을 하는가. 이 장의 인물들은 차례로 답한다 — 보이는 대로, 빛이 닿는 순간, 내가 느낀 색, 사물의 뼈대, 여러 각도를 한꺼번에.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붓을 놓고 물건을 고른다.

1863 — 떨어진 그림들의 전시회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863년 살롱 심사위원회는 출품작 5천 점 중 3천 점 가까이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화가들의 항의가 커지자 나폴레옹 3세가 살롱 옆에 「낙선전」을 열게 했다. 관객이 직접 판단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웃으러 몰려갔다. 가장 크게 비웃음을 산 그림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다.

누구였나 에두아르 마네(1832~1883). 파리 판사의 아들로 부유했고, 해군 시험에 두 번 떨어진 뒤 화가가 됐다. 검은 실크해트를 쓰고 대로변 카페에 앉아 있는 신사였다. 그는 반항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살롱에서 인정받고 훈장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림을 내놓을 때마다 소동이 났다.

원문 · 출처 「마네 씨는 결코 이 그림에서 외설을 의도하지 않았다 … 화가들, 특히 마네 같은 분석적인 화가는 대중의 이 집착 — 주제에만 매달리는 — 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 에밀 졸라, 「에두아르 마네」(1867). 스물일곱 살의 졸라가 마네를 변호하며 쓴 글. 「주제는 구실이고 그림은 그림 자체」라는 이 생각이 그 뒤 100년 현대미술의 첫 문장이 된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벗은 여자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는 「여신이 아닌 벗은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신화라는 핑계를 빼면 그것은 그냥 파리의 여자와 남자들, 그러니까 자기들 이야기였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여자의 눈을 보십시오. 우리를 봅니다. 그때까지 벗은 여자는 눈을 감거나 딴 데를 봤습니다. 이 여자는 「너 지금 나 보고 있지」라고 말하는 눈입니다. 모델은 빅토린 뫼랑, 당시 열여덟이었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마네가 「평평함」을 의도했는가, 아니면 그저 그렇게 그려졌는가. 20세기 중반 비평가 그린버그는 마네를 「평면성을 인정한 첫 화가」로 세워 현대미술의 기원으로 삼았고, 그 뒤 이 해석이 교과서가 됐다. 반론은 마네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그는 살롱의 인정을 원했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풀밭 위의 점심」이 정확히 무엇을 그린 것인지 — 창녀와 손님인가, 화가와 모델인가, 그냥 소풍인가 — 도 정해지지 않았다.

가려진 사람 빅토린 뫼랑.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의 그 여자다. 마네의 모델로 10년을 일했고, 그 뒤 스스로 화가가 됐다. 1876년 살롱에 그녀의 자화상이 걸렸다. 그해 마네는 낙선했다. 그녀는 1879년과 1885년에도 살롱에 걸렸다. 그리고 잊혔다. 미술사는 그녀를 「마네의 모델, 뒤에 술꾼으로 몰락」이라고 적었는데, 2004년 연구로 그녀가 1927년까지 살며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가르쳤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그림은 한 점만 확인된다.

🖼 풀밭 위의 점심 (1862~1863) — 캔버스에 유채, 208×264cm ·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그때 조선은 철종이 죽고 열두 살 고종이 왕위에 오른 해다(12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10년 집권이 시작된다.

천 년 동안 걸려 있던 벗은 여신을 벗은 이웃으로 바꾸면 무엇이 무너지는가.

1874 — 「인상」이라는 욕이 이름이 되다

파리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874년 4월 15일, 파리 카퓌신 대로 35번지 사진가 나다르의 옛 작업실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살롱에 매번 떨어지던 화가 서른 명이 「무명 예술가 협회」라는 이름으로 자기들 돈으로 연 전시다. 심사 없음, 상 없음. 쿠르베(4장)가 19년 전 혼자 한 일을 서른 명이 함께 한 것이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세잔, 그리고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

누구였나 클로드 모네(1840~1926). 르아브르에서 자라 열여섯에 캐리커처를 팔았고, 바닷가 화가 부댕에게서 「밖에 나가서 그려라」를 배웠다. 파리로 와서 마네와 이름이 비슷해 늘 혼동됐다. 젊어서 가난했다. 1868년에는 빚에 몰려 센 강에 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편지에 썼다. 첫 아내 카미유가 1879년에 서른둘로 죽었을 때 그는 그녀의 죽은 얼굴을 그렸고, 뒤에 「그 얼굴의 색을 관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원문 · 출처 「인상 —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인상을 받았으니 거기 인상이 있는 게지 … 벽지 밑그림도 이 바다 그림보다는 완성됐겠다!」 — 루이 르루아,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 『르 샤리바리』 1874년 4월 25일. 전시장을 도는 가상의 노(老)화가가 그림마다 화를 내다 미쳐 버린다는 풍자 기사다. 이 기사 제목의 한 단어가 미술사의 한 시대 이름이 됐다.

쉽게 말하면 우리 눈은 「배」를 보지 않습니다. 배에서 반사된 빛의 얼룩을 봅니다. 뇌가 그것을 「배」로 정리할 뿐입니다. 인상파는 뇌가 정리하기 전의 얼룩을 그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보면 붓자국이고 멀리 보면 항구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해를 보십시오. 주황색 원 하나. 그런데 그 해는 주변 안개보다 밝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흑백으로 바꾸면 해가 거의 사라집니다. 밝기는 같고 색만 다릅니다. 그래서 해가 「떠 있는」 게 아니라 「떨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경과학자들이 뒤에 설명한 현상을 모네는 눈으로 알았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인상」이라는 제목을 모네가 아무렇게나 붙였는지, 아니면 이미 「인상」이 화가들 사이의 용어였는지(그렇다면 르루아는 그 말을 받아친 것이 된다)는 갈린다. 이 그림이 해돋이인지 해넘이인지도 오랫동안 논란이었는데, 2014년 천문학적 분석으로 해돋이 쪽이 유력해졌다. 그림은 1985년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총을 든 강도들에게 도난당했다가 1990년 코르시카에서 되찾았다.

가려진 사람 프레데리크 바지유. 모네·르누아르의 친구로, 부유한 집 아들이라 가난한 그들의 화실 값을 대고 그림을 사 주었다. 「심사 없는 우리들만의 전시회」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 그였다(1867년 편지).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자원해 스물여덟에 전사했다. 그가 제안한 전시회는 4년 뒤 그 없이 열렸다. 그의 그림은 서른 점 남짓 남았고, 그 안에 젊은 모네와 르누아르가 그의 화실에 앉아 있다.

🖼 인상, 해돋이 (1872) — 캔버스에 유채, 48×63cm ·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파리

그때 조선은 고종 11년. 대원군이 물러나고(1873)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듬해다.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고, 2년 뒤 강화도조약이 온다.

「덜 그렸다」는 욕이 정확한 칭찬이 되는 순간, 「완성」이라는 말은 무엇이 되는가.

1888 — 노란 집의 침실

아를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888년 2월, 서른다섯의 고흐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에 내렸다. 눈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일본 같은」 빛을 찾아왔다고 했다. 5월에 광장 모퉁이의 노란 집을 빌렸고, 화가들이 함께 사는 「남쪽의 화실」을 꿈꿨다. 동생 테오가 돈을 댔다. 그해 그는 200점 가까이 그렸다. 해바라기, 밤의 카페, 별이 빛나는 론 강, 그리고 10월에 자기 침실.

누구였나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네덜란드 목사의 아들로 화랑 점원, 교사, 서점 직원, 전도사를 거쳤고 모두 실패했다. 벨기에 탄광촌에서 광부들에게 설교하다 「너무 열심이라」 해고됐다. 스물일곱에 그림을 시작했다. 10년을 그렸고 유화 860점을 남겼다. 살아서 판 그림은 확인된 것으로 한 점(「붉은 포도밭」, 1890, 400프랑)이다.

원문 · 출처 「이번에는 그냥 내 침실이야. 여기서는 색이 모든 것을 해야 해 … 벽은 옅은 보라, 바닥은 붉은 타일, 침대와 의자는 신선한 버터 같은 노랑, 시트와 베개는 아주 옅은 연둣빛 레몬, 이불은 진홍, 창문은 초록, 세면대는 주황, 대야는 파랑, 문은 라일락 … 그림자는 없애 버렸어, 일본 판화처럼.」 — 고흐가 테오에게, 1888년 10월 16일. 편지 안에 그림의 밑그림도 그려 넣었다.

쉽게 말하면 고흐 하면 「미친 천재」를 떠올리지만,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이것은 미친 사람이 그린 게 아니라 잠들고 싶은 사람이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편지에 「쉼」이라고 썼습니다. 색으로 마음의 상태를 그리는 것 — 보이는 대로(인상파)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 이것이 고흐가 미술에 준 것입니다. 20세기 표현주의가 여기서 나옵니다.

무엇이 보이나 먼저 방의 모양을 보십시오. 벽이 기울고 바닥이 앞으로 쏟아집니다. 원근법이 틀린 게 아닙니다. 노란 집의 이 방은 실제로 뒤쪽 벽이 비스듬한 사다리꼴이었습니다. 고흐는 그것을 조금 더 밀어붙였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귀다. 잘라 낸 것이 귓불 일부라는 설이 오래 통했으나, 2016년 버나뎃 머피가 치료한 의사 레이의 1930년 스케치를 찾아내 귀 거의 전체였음을 밝혔다. 누가 잘랐는가도 논란이다. 2009년 독일 학자 둘이 「고갱이 펜싱 검으로 잘랐고 둘이 입을 맞췄다」는 설을 냈으나 대다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도 그렇다. 자살이 정설이지만 2011년 전기 작가들은 「마을 소년들이 쏜 총에 맞았다」는 설을 냈고, 반 고흐 미술관은 이를 부정한다.

가려진 사람 요한나 반 고흐봉어르. 테오의 아내다. 빈센트가 죽고 반년 뒤 테오도 죽었을 때 그녀는 스물여덟이었고, 아기와 그림 수백 점과 편지 뭉치가 남았다. 남들은 「그림은 팔릴 리 없으니 처분하라」고 했다. 그녀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숙을 치며 그림을 정리하고 전시를 조직하고 편지를 번역해 1914년에 출판했다. 고흐를 세상이 알게 된 것은 그녀의 25년 덕이다. 우리가 「고흐의 편지」를 읽을 때 그것은 그녀가 골라 엮은 편지다.

🖼 아를의 침실 (1888) — 캔버스에 유채, 72×90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그때 조선은 고종 25년. 러시아와 육로 통상 조약을 맺어 두만강 국경 무역을 연 해다. 2년 전 세운 육영공원에서 미국인 교사들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쉼」을 그리는데 보색을 썼다면, 그 쉼은 무엇으로부터의 쉼인가.

1906 — 산 하나를 서른 번 그리다

엑상프로방스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1906년 10월 15일, 예순일곱의 세잔이 엑상프로방스 교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폭우를 만났다. 몇 시간을 비를 맞고 쓰러졌고, 지나던 세탁물 수레가 그를 집으로 실어 왔다. 이튿날 그는 다시 정원에 나가 그리다 쓰러졌고, 22일에 죽었다. 마지막까지 그리던 것은 생트빅투아르 산이다. 그는 이 산을 유화로 마흔 점 넘게, 수채로 마흔 점 넘게 그렸다.

누구였나 폴 세잔(1839~1906). 엑상프로방스 은행가의 아들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소년 시절 친구였다. 아버지 뜻대로 법학을 하다 그만두고 파리로 갔다. 무뚝뚝하고 의심 많고 화를 잘 냈다. 살롱에 20년 넘게 냈다 매번 떨어졌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팔리지 않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다.

원문 · 출처 「자연을 원기둥과 구와 원뿔로 다루십시오. 모든 것을 원근 속에 놓고, 사물과 면의 각 측면이 하나의 중심점을 향하게 하십시오.」 — 세잔이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1904년 4월 15일. 이 한 줄이 3년 뒤 「입체파(큐비즘)」의 출발점으로 인용된다. 세잔 자신은 그렇게 그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보라는 뜻으로 썼다.

쉽게 말하면 인상파(모네)는 「빛」을 그렸습니다. 순간마다 바뀌는 것을요. 세잔은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그림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순간이 아니라 구조. 산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산이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무엇이 보이나 먼저 붓자국을 보십시오. 산도 하늘도 밭도 같은 크기의 네모난 색 조각입니다. 벽돌을 쌓듯이 그렸습니다. 이 조각들이 「구성적 붓질」이라 불리는 세잔의 발명입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졸라와의 절교. 1886년 졸라가 소설 『작품』에서 실패한 화가를 그렸고 세잔이 그것을 자기 이야기로 읽고 편지를 끊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2013년 그 뒤에 쓴 세잔의 편지(1887)가 발견되어 두 사람이 계속 연락했음이 드러났다. 「절교」는 세잔 사후 전기 작가들이 만든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불렸다는 피카소·마티스의 말도 직접 기록은 없고 전언이다.

가려진 사람 오르탕스 피케. 세잔의 아내다. 그는 그녀를 스물아홉 번 그렸는데, 매번 무표정하고 뻣뻣하다. 그래서 세잔 전기들은 그녀를 「따분한 여자」 「남편을 이해 못 한 여자」로 적었다. 세잔이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그 무표정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그의 요구였다. 그녀는 20년 동안 세잔 아버지에게 존재를 숨긴 채 아들을 키웠다. 2014년 메트로폴리탄이 그녀의 초상만 모아 전시를 열었을 때, 처음으로 「그녀」가 보였다.

🖼 생트빅투아르 산 (1902~1906년경) — 캔버스에 유채 (연작) · 여러 미술관 (필라델피아·바젤·취리히 등)

그때 조선은 을사늑약(1905) 이듬해.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2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해다. 이 해부터 5년 뒤 나라가 없어진다.

같은 산을 서른 번 그리는 것은 산을 알아 가는 일인가, 아니면 산을 한 번도 다 그리지 못했다는 고백인가.

1907 — 친구들도 등을 돌린 그림

파리 몽마르트르 (프랑스)

무슨 일이 있었나 몽마르트르 언덕의 낡은 목조 건물 「세탁선(바토라부아르)」. 스물다섯의 피카소가 1907년 여름 그 안의 화실에서 가로 2.3미터의 그림을 끝냈다. 벗은 여자 다섯. 바르셀로나 아비뇽 거리 사창가의 여자들이다. 얼굴이 이상하다. 왼쪽 여자는 이집트 부조처럼 옆얼굴에 정면 눈이고,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처럼 깎이고 줄이 그어져 있다. 몸은 유리 조각처럼 각져 있다. 뒷배경과 앞의 몸이 같은 조각들로 되어 있어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없다.

누구였나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스페인 말라가에서 미술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열네 살에 아버지보다 잘 그렸다. 스무 살에 파리로 왔고, 가난했고, 친구가 자살한 뒤 몇 해 동안 파란색만으로 그렸다(청색 시대). 그 뒤 분홍(장밋빛 시대), 그 뒤 이 그림.

원문 · 출처 「아비뇽의 처녀들 — 그 이름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살몽이 지어냈어. 자네도 알다시피 원래는 「아비뇽의 사창가」였지.」 — 피카소가 화상 칸바일러에게, 1933년. 「아비뇽」은 프랑스 도시가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거리 이름이다. 그 거리에 사창가가 있었고, 피카소가 화구를 사던 가게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마사초가 연 「창」(1장)을 마네가 닫기 시작했고(1863), 세잔이 사물을 덩어리로 바꿨고(1906), 피카소가 그 덩어리를 부수어 한 화면에 여러 각도를 넣었습니다. 옆얼굴에 정면 눈이 있는 것은 「한 번에 두 방향에서 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입체파의 씨앗입니다.

무엇이 보이나 (이미지를 실을 수 없어 말로 짚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이다. 피카소는 뒷날 「아프리카 미술? 몰라」라고 말한 적이 있고, 오른쪽 두 얼굴을 그릴 때 아직 트로카데로에 가지 않았다는 주장(이베리아 조각만 영향)과 갔다는 주장이 맞선다. 지금은 두 가지가 다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 이 그림이 「최초의 입체파 그림」인가에 대해서도 갈린다 — 브라크의 1908년 풍경화가 첫 입체파이고 이것은 「입체파 이전의 폭발」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을 「20세기 미술의 시작」에 걸어 둔 MoMA의 결정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라는 지적이 있다.

가려진 사람 페르낭드 올리비에. 이 그림을 그릴 때 피카소와 살던 여자로, 세탁선 시절 7년의 유일한 목격자다. 1933년 그녀가 그 시절을 쓴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을 내자 피카소는 소송으로 연재를 막았다. 그녀는 가난하게 죽었고, 회고록의 나머지 원고는 두 사람이 다 죽은 뒤 1988년에야 출판됐다. 우리가 「1907년 세탁선의 피카소」를 아는 것은 대부분 그녀가 쓴 것인데, 그녀의 이름은 「피카소의 첫 연인」으로만 남았다.

🖼 아비뇽의 처녀들 (1907) — 캔버스에 유채, 244×234cm · 뉴욕 현대미술관 (MoMA)

그때 조선은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7월), 군대가 해산되고(8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이 일어난 해다.

보는 사람을 위협하는 그림은 왜 미술관의 첫 방에 걸리는가.

1917 — 변기가 미술관에 들어가려 하다

뉴욕 (미국)

무슨 일이 있었나 1917년 4월, 뉴욕 독립미술가협회가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규칙은 두 가지. 심사 없음, 상 없음. 회비 6달러를 내면 누구든 무엇이든 걸 수 있다. 쿠르베(1855)와 인상파(1874)가 파리에서 한 일이 대서양을 건너온 것이다. 협회 이사 중 하나가 서른 살의 프랑스인 마르셀 뒤샹이었다.

누구였나 마르셀 뒤샹(1887~1968). 프랑스 노르망디 공증인의 아들로 형 둘도 미술가였다. 1912년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가 파리 입체파 전시에서 「너무 미래파 같다」고 거부당했고, 이듬해 뉴욕 아모리 쇼에서 같은 그림이 소동을 일으켜 미국에서 유명해졌다. 1915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원문 · 출처 「머트 씨의 샘이 부도덕하지 않다는 것은 욕조가 부도덕하지 않은 것과 같다 … 머트 씨가 그것을 손수 만들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골랐다. 일상의 물건을 가져다 새 제목과 새 관점 아래 놓아 그 쓸모가 사라지게 했다 — 그 물건에 새 생각을 만들어 준 것이다.」 — 「리처드 머트 사건」, 『눈먼 사람』 2호(1917년 5월). 서명이 없다. 뒤샹, 혹은 그의 친구 루이즈 노턴이나 베아트리스 우드가 썼다고 본다.

쉽게 말하면 이 루트의 스물두 정거장은 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조토는 「사람을 보이게 하는 것」, 마사초는 「창」, 카라바조는 「빛」, 모네는 「순간」, 세잔은 「구조」라고 답했습니다. 뒤샹은 질문을 바꿨습니다. 「그린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른다」가 중요하다고. 미술가는 손이 아니라 생각으로 일한다고.

무엇이 보이나 (이미지를 실을 수 없어 말로 짚습니다.)

아직도 논란인 것 「샘」을 정말 뒤샹이 냈는가. 1917년 4월 11일 뒤샹이 여동생 수잔에게 쓴 편지에 「리처드 머트라는 가명을 쓰는 여자 친구 하나가 도기 소변기를 조각이라며 보냈다」는 문장이 있다. 이를 근거로 다다 시인 엘자 폰 프라이타크로링호펜이 진짜 작가라는 주장이 2000년대 이후 강해졌다. 반론은 편지의 표현이 모호하고 뒤샹이 뒤에 일관되게 자기 것이라 했으며 복제품을 승인했다는 것이다.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답다.

가려진 사람 엘자 폰 프라이타크로링호펜. 독일 출신 남작 부인이자 다다 시인으로, 1917년 뉴욕에서 쓰레기와 배관 부품으로 조각을 만들고 깡통과 숟가락을 몸에 달고 거리를 걸었다. 뒤샹의 편지 속 「여자 친구」가 그녀라는 주장의 근거는 그녀가 배관 부품을 재료로 썼다는 점, 「R. Mutt」를 독일어 「가난(Armut)」의 말장난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소변기가 필라델피아에서 발송됐는데 그때 그녀가 필라델피아에 살았다는 점이다. 확정된 것은 없다. 그녀는 1927년 파리에서 가스 사고로 죽었다.

🖼 샘 (1917 (복제품 1964)) — 도기 소변기, 검은 물감 서명 · 테이트 모던, 런던 (1964년 복제품) 외

그때 조선은 일제강점기 7년째.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해(1~6월)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꼽힌다. 2년 뒤 3·1운동이 온다.

「고른 것」이 작품이라면, 고르는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가.

플라톤Plato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칸트Kant헤겔Hegel보들레르Baudelaire벤야민Walter Benjamin푸코Foucault백남준Nam June Paik

작품 이미지는 저작권이 만료된 것(작가 사후 70년)만 싣습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의 「2차원 퍼블릭 도메인 작품의 충실한 복제 사진은 퍼블릭 도메인」 원칙을 따릅니다. 아직 보호 기간 안에 있는 작품(피카소·뒤샹)은 소장처 링크만 둡니다.Images are included only for works whose copyright has expired (70 years after the artist’s death), following Wikimedia Commons’ PD-Art principle. Works still under protection (Picasso, Duchamp) get a link to the museum instead.

엠케이아틀라스 · 철학아틀라스 — 예술사 루트의 세 번째. 「국악」과 「한국미술」이 뒤따릅니다. MK ATLAS · Philosophy Atlas — the third of the art-history routes. Gugak and Korean art will fo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