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보들레르 초상
이성의 시대

샤를 보들레르

예술
1821 ~ 1867 · 파리
영원한 아름다움만 좇던 미학에 지금 이 순간을 들여놓은 사람 — 근대성이라는 말의 출처

그가 살았던 시대

오스만 남작이 파리를 갈아엎던 때다. 중세의 좁은 골목이 헐리고 곧은 대로와 가스등과 유리 지붕 아케이드가 들어섰다. 백화점이 문을 열고, 신문이 대량으로 찍히고, 사진이 발명되어 초상은 더 이상 귀족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그리고 거리에는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 마을에서는 있을 수 없던 일이다. 보들레르는 물려받은 재산을 이십 대에 탕진해 법원이 지정한 후견인의 관리를 받으며 평생 빚에 쫓겼고, 바로 그 도시를 걸어 다녔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근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사라지는 것, 우연한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영원한 것, 불변하는 것이다." — 「현대 생활의 화가」(1863)
결국 예술이 영원만 붙들면 절반을 놓친다는 얘기다. 그때까지 미학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다뤘다. 보들레르는 반대쪽 절반을 가리켰다 — 올해 유행하는 모자의 각도, 마차의 광택, 가스등 아래에서만 보이는 얼굴빛. 십 년 뒤면 우스워질 것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들이 그 시대의 얼굴이라는 것.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고전을 그리는 대가가 아니라 신문 삽화가를 골랐다. 오늘로 치면 미술평론가가 이 시대의 화가로 광고 사진가를 꼽는 셈이다.
"군중은 그의 영역이다. … 완벽한 산책자에게, 열정적인 관찰자에게,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에 자리 잡는 것은 거대한 기쁨이다." — 「현대 생활의 화가」
산책자(플라뇌르)는 구경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익명으로 군중에 섞여 흘러가며 보기만 한다. 이 자리는 근대 도시가 처음 만들어낸 자리다 — 서로를 다 아는 마을에서는 익명의 관찰자가 될 수 없으니까. 오늘 카페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자세, 화면을 넘기며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자세가 여기서 시작된다. 보들레르가 그 자세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새로 생긴 자리라는 것을 알아보고 이름을 붙였다.

삶이 만든 철학

1857년 『악의 꽃』이 나오자 검찰이 기소했다. 여섯 편이 공중도덕 훼손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삭제 명령과 벌금이 떨어졌다. 그 판결이 취소된 것은 1949년이다 — 시인이 죽고 여든두 해 뒤. 무엇이 문제였나. 그는 시가 다뤄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병든 몸, 부패, 도시의 밑바닥, 권태.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는 대신 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캐내려 했고, 그러면서 독자를 구경꾼 자리에 두지 않았다. 시집의 첫 시는 독자를 자기와 똑같은 위선자라 부르며 끝난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를 십칠 년에 걸쳐 프랑스어로 옮겼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 작가가 유럽의 고전이 된 것은 그 번역 덕이 크다. 말년에는 정형시의 틀을 버리고 산문시를 썼다 — 대도시의 끊기고 튀는 리듬에 운율이 맞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파리의 우울』이 그것이다. 186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는 말을 잃었다. 실어증으로 일 년 넘게 거의 한 마디도 하지 못하다 마흔여섯에 죽었다. 근대라는 말을 정의한 사람이 말을 잃고 죽은 셈이다. 그리고 칠십 년 뒤, 벤야민이 그를 근대 전체를 읽는 열쇠로 삼는다. 아케이드와 군중과 산책자를 통해 자본주의가 사람의 지각을 어떻게 바꿨는지 읽으려 한 것이다. 보들레르가 시로 쓴 것을 벤야민이 이론으로 옮겼다고 해도 좋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십 년 뒤면 낡아 보일 것들 안에 지금 이 시대의 얼굴이 있는가?
  • 익명으로 군중 속에 있을 때 사람은 무엇을 보게 되는가?
  • 추한 것과 병든 것도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지금 너무 흔해서 눈에 담기지도 않는 것 가운데, 백 년 뒤 사람들이 이 시대의 얼굴이라 부를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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