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초상
이성의 시대

리하르트 바그너

예술
1813 ~ 1883 · 바이로이트(독일) — 자기 작품만을 위해 지은 극장
작품과 사람을 우리는 나눠서 대할 수 있는가

그가 살았던 시대

빚쟁이를 피해 도망 다니며 살았다. 리가에서 국경을 몰래 넘었고, 런던으로 가는 배에서 만난 폭풍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되었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해 지명 수배됐고 12년을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했다. 그를 구한 것은 열여덟 살의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다 — 즉위하자마자 그를 불러 빚을 갚아 주고 극장 건설비를 댔다. 그는 지휘자 뷜로의 아내 코지마와 관계를 맺었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딸이었고 뷜로는 바그너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바그너의 오페라를 계속 지휘했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재혼했고, 그가 죽은 뒤 바이로이트를 47년간 운영했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음악에서의 유대성」(1850) — 유대인에게는 진정한 예술 창조 능력이 없다는 주장
이 글은 처음에 가명으로 냈고, 1869년에 자기 이름으로 크게 늘려 다시 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표적이 마이어베어라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마이어베어는 그를 도운 사람이다. 파리에서 그를 후원했고, 「리엔치」를 드레스덴 무대에 올리도록 추천서를 써 주었다. 바그너의 첫 성공작이 그 덕분에 나왔다. 이 사실을 빼고 그를 소개할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뒤에 나치가 자기 것으로 삼았고,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그의 음악을 공개 연주하는 것이 금기였다. 2001년 바렌보임이 텔아비브에서 관객과 40분간 토론한 뒤 「트리스탄」 전주곡을 앙코르로 연주했을 때, 나가겠다는 사람은 나가게 했고 남은 사람들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다음 날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정치인들이 이를 스캔들이라 불렀다.

삶이 만든 철학

그는 자기 작품을 오페라라 부르지 않고 「악극」이라 불렀다. 음악과 극과 시와 무대가 하나로 녹은 종합예술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리아가 끝나고 박수받는 구조를 없앴고, 노래가 끊기지 않고 계속 흐르게 만들었다. 그가 만든 기법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이 라이트모티프다. 인물이나 사물이나 감정에 짧은 선율을 하나씩 배당하고, 그것이 나올 때마다 그 대상을 가리키게 한다. 반지, 검, 저주, 사랑에 각각 다른 조각이 있다. 이 기법의 힘은 무대에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물이 거짓말을 하는데 관현악이 진실의 선율을 연주하면, 관객만 진실을 안다. 영화음악이 이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가 지은 극장도 주장이었다. 오케스트라를 무대 아래 구덩이에 숨겨 관객이 연주자를 못 보게 했고, 객석을 부채꼴로 만들어 귀족용 특별석을 없앴으며, 공연 중 객석을 어둡게 했다. 오늘날 극장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여기서 시작됐다. 첫 축제는 크게 적자를 냈고 다음 축제는 6년 뒤에야 열렸다.

그가 던진 질문들

  • 한 사람의 작품과 그 사람의 행실을 나눠서 대할 수 있는가?
  • 무대에 없는 것을 음악이 말할 수 있는가?
  • 예술을 위해 지어진 성전은 누구의 것인가?
한 사람의 작품과 그 사람의 행실을 우리는 나눠서 대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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