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베르디 초상
이성의 시대

주세페 베르디

예술
1813 ~ 1901 · 밀라노(이탈리아) — 라 스칼라와 통일 운동의 도시
그의 이름이 검열을 피해 왕을 외치는 암호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

시골 여관집 아들이었다. 밀라노 음악원에 지원했다가 나이가 많고 피아노 자세가 나쁘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 지금 그 학교의 이름이 「베르디 음악원」이다. 스물여섯 무렵 2년 사이에 두 아이와 아내를 병으로 잃었고, 그 와중에 계약된 희극 오페라를 써야 했으며 그 작품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그는 다시는 작곡하지 않겠다고 했다. 극장 지배인이 억지로 쥐여 준 대본이 「나부코」였다. 만년에는 부자가 되어 고향에 농장을 사고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한 요양원을 지었다. 자기가 만든 어떤 작품보다 그 집이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곳에 묻혔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비바 베르디(VERDI)」 — 이탈리아 통일 운동기 벽에 적힌 낙서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 있던 도시에서 왕의 이름을 외치는 것은 잡혀갈 일이었다. 그런데 「Vittorio Emanuele Re D’Italia(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머리글자를 모으면 VERDI가 된다. 작곡가의 이름을 외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왜 하필 그의 이름이었는가.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때문이다.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인데,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노래로 삼았다. 이 곡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음악적 이유도 있다. 합창단 전체가 성부를 나누지 않고 한 덩어리로 같은 가락을 부르는 대목이 있어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다. 그의 장례식에서 수만 명이 이 곡을 불렀다.

삶이 만든 철학

음악에서 그의 신조는 단순하다. 오페라는 목소리다. 관현악은 노래를 받쳐 주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무대에 선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극을 끌고 가야 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바그너가 정확히 반대편에서 관현악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고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바그너가 죽었을 때 베르디는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로 시작하는 짧은 메모를 남겼다 — 예술사에 한 이름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의 오페라는 지금도 부르기 어렵지만 부르고 싶은 작품으로 남았다. 성악가들이 평생을 걸고 도전하는 배역 대부분이 그의 것이다. 「라 트라비아타」는 당대 인물을 당대 의상으로 무대에 올리려다 검열에 걸려 100년 전 시대로 옮겨 상연했고, 초연은 실패했다. 1년 뒤 재상연에서 성공했다. 「아이다」는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는 카이로의 극장 개관작으로 위촉받아 썼다. 그리고 일흔넷과 여든에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냈다 — 마지막 작품이 희극이었고, 그것은 젊어서 그를 무너뜨렸던 장르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예술이 정치의 암호가 될 수 있는가?
  •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잘 만드는 것은 언제 같아지는가?
  • 젊어서 실패한 것으로 늙어서 돌아갈 수 있는가?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잘 만드는 것은 언제 같아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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