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차이콥스키 초상
이성의 시대

표트르 차이콥스키

예술
1840 ~ 1893 · 모스크바(러시아)
13년을 후원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이

그가 살았던 시대

법률학교를 나와 법무성 관리로 일하다 스물세 살에 그만두고 새로 문을 연 음악원에 들어갔다. 늦은 출발이었다. 그는 동성애자였고 당시 러시아에서 그것은 드러낼 수 없는 일이었다. 스물일곱 살 제자와 결혼했으나 몇 주 만에 파탄 났고 그는 강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했다. 쉰셋에 죽었는데, 사인은 콜레라로 발표됐으나 끓이지 않은 물을 일부러 마셨다는 설과 명예 재판에 몰려 자살을 강요당했다는 설이 오래 제기됐다. 어느 쪽도 확정된 것은 없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과 13년간 주고받은 1,200통 넘는 편지 —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부유한 미망인이 그에게 연금을 보내 생계를 책임졌다. 조건은 하나, 결코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13년 동안 편지만 주고받았고, 음악과 삶과 신에 대해 썼다. 몇 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으나 서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 관계는 어느 날 부인이 일방적으로 끊으며 끝났다. 재정 사정을 이유로 들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차이콥스키는 이 일에 깊이 상처받았고 죽을 때까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만나지 않기로 한 관계가 13년을 갔다는 사실 자체가 물음이 된다. 얼굴을 보지 않아야만 가능한 친밀함이 있는가. 지금 우리가 화면 너머로 맺는 관계들을 생각하면 낯선 이야기만은 아니다.

삶이 만든 철학

그가 바꾼 것은 발레 음악의 지위다. 그 전까지 발레 음악은 무용수가 춤추기 편하도록 만든 반주였다. 작곡가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다른 곡을 갖다 끼워 넣기도 했다. 차이콥스키는 발레 음악을 교향곡처럼 썼다. 주제가 발전하고 관현악이 두꺼워지고 곡 자체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래서 그의 발레는 춤 없이 음악만 들어도 성립한다. 우리가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을 음반으로 듣는 것이 그 증거다. 다만 첫 시도는 실패했다. 1877년 「백조의 호수」 초연은 혹평을 받았고, 음악이 너무 복잡해 춤추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이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은 그가 죽고 2년 뒤 안무를 새로 짠 재상연부터다. 그는 「1812년 서곡」처럼 널리 사랑받는 곡을 스스로 시끄럽고 조잡하다고 낮게 평했다. 반대로 마지막 작품인 「비창」 교향곡은 빠르게 끝나지 않고 아주 느리게 사그라들며 끝난다. 당시로서는 전례가 드문 끝맺음이었고, 초연 9일 뒤 그는 죽었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얼굴을 보지 않아야만 가능한 친밀함이 있는가?
  • 처음 내놓았을 때 혹평받은 것이 왜 나중에 대표작이 되는가?
  • 만든 사람의 평가와 세상의 평가가 갈릴 때 어느 쪽이 옳은가?
처음 내놓았을 때 혹평받은 것이 나중에 대표작이 되는 일은 왜 생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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