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1922 ~ 1996 · 케임브리지(매사추세츠)
과학은 쌓이지 않는다, 갈아엎힌다 —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
그가 살았던 시대
쿤은 물리학 박사였다. 대학원생 시절 비전공자를 위한 과학사 수업을 맡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읽다가 그는 막혔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이 어떻게 운동에 관해서만 이토록 형편없을 수 있는가. 한참을 붙들고 있다가 어느 날 관점이 뒤집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뉴턴이 답하려던 질문에 서투르게 답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질문에 훌륭하게 답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운동은 위치 변화가 아니라 변화 일반이었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것도 그에게는 운동이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계 자체가 그와 함께 바뀐다. … 혁명 이후 과학자들은 다른 세계에서 일한다." — 『과학혁명의 구조』
과장처럼 들리지만 관찰에 관한 주장이다. 같은 하늘을 보아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자는 지구 둘레를 도는 태양을 보고,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자는 지평선 아래로 넘어가는 지구를 본다. 망막에 맺힌 상은 같고 그것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다르다.
중립적인 관찰이란 없다는 것 — 이것을 관찰의 이론 적재성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자료로 셀지, 무엇을 잡음으로 버릴지가 이미 이론에 의해 정해져 있다. 그래서 두 진영이 같은 자료를 놓고도 다른 결론에 이르는 일이 생긴다.
"정상과학은 새로움을 찾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퍼즐 풀이다." — 『과학혁명의 구조』
이 문장이 포퍼를 정면으로 겨눈다. 포퍼는 과학자가 늘 자기 이론을 죽이려 든다고 했지만, 쿤이 보기에 과학자가 실제로 하는 일의 99퍼센트는 그 반대다. 주어진 틀을 의심하지 않고 그 안에서 남은 문제를 푸는 것.
그리고 쿤은 그것이 결함이 아니라고 했다. 매번 근본을 의심하면 아무 진전도 없다. 틀을 잠시 믿어 주기 때문에 정밀해질 수 있고, 정밀해졌기 때문에 비로소 틀이 안 맞는 자리 — 변칙 — 가 드러난다. 혁명은 의심에서 오지 않고 축적된 정밀함에서 온다.
삶이 만든 철학
1962년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사를 다룬 얇은 책인데, 20세기에 가장 많이 인용된 학술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안에서 그는 과학의 진행을 이렇게 그렸다 — 정상과학이 이어지다가 변칙이 쌓이고, 위기가 오고, 혁명이 일어나 새 패러다임이 자리 잡고, 다시 정상과학이 된다. 계단이 아니라 지질층이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통약불가능성이다. 새 패러다임과 옛 패러다임은 같은 낱말을 다른 뜻으로 쓰기 때문에 완전히 번역되지 않고, 그래서 어느 쪽이 우월한지 판정할 중립적인 잣대가 없다는 것. 뉴턴의 질량과 아인슈타인의 질량은 이름만 같다. 여기서 사람들은 쿤을 상대주의자로 읽었고 — 과학이 진리와 무관한 유행이라는 뜻이냐 — 쿤 자신은 평생 그 독해를 부인했다. 그는 과학이 더 나아진다고 믿었다. 다만 진리를 향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이 커지는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목적지가 있는 진보가 아니라 다윈식 진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의 어휘는 학계 밖으로 퍼져 나가 원래 뜻과 멀어졌다. 오늘날 패러다임 전환은 회의실에서 사소한 방향 변경을 뜻하는 상투어가 되었다. 쿤은 그 유행을 싫어했다.
포퍼와 쿤 가운데 누가 옳았는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둘을 합쳐 놓으면 남는 물음이 선명하다. 과학이 하는 일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아내는 것인지, 아니면 당분간 가장 잘 작동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인지.
그가 던진 질문들
-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보는 일은 왜 생기는가?
- 의심하지 않는 시기가 있어야 학문이 정밀해지는가?
- 두 이론 가운데 어느 쪽이 나은지 잴 중립적인 잣대가 있는가?
당신이 지금 잡음이라고 여겨 버리고 있는 것 가운데, 사실은 자료였던 것이 있을까요?
이 사람이 놓인 물음같은 물음 아래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 3개의 질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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