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초상
현대의 사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철학
1879 ~ 1955 · 프린스턴(뉴저지)
자기가 세운 집의 기초를 끝까지 의심한 사람 —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그가 살았던 시대

1900년 전후의 물리학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하늘과 땅을 다 설명하는 듯했다. 그 건물을 무너뜨린 사람이 특허청 서기였다. 1905년 한 해에 그는 빛이 알갱이처럼 행동한다는 것(광양자),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특수상대성)을 밝힌 논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 광양자 논문이 씨앗이 되어 자란 양자역학이, 정작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 되어 돌아온다. 세계가 확률로만 말해진다는 것 — 그는 죽을 때까지 그것이 이론의 불완전함이라고 믿었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양자역학은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내 안의 목소리는 이것이 아직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 (1926)
결국 확률은 세계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 앎의 부족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주사위를 던져도 결과가 무작위인 것은 우리가 초기 조건을 모르기 때문이지, 주사위 자체가 정해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는 양자역학의 확률도 그런 것이길 바랐다 —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더 깊은 층이 있어서, 거기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기를. 주의할 것 하나. 이 말의 "신"은 인격신이 아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신 — 자연의 질서 자체 — 을 믿는다고 여러 번 밝혔다. 이 문장은 신앙 고백이 아니라 세계의 합법칙성에 대한 신뢰다.
"물리학은 유령 같은 원격 작용 없이 살아야 한다." — 얽힘을 두고 보른에게 (1947). 훗날 사람들은 이 표현을 "유령 같은 원격 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으로 줄여 부른다
1935년 그는 동료 둘과 함께 훗날 EPR이라 불리는 논문을 낸다. 얽힌 두 입자는 아무리 멀어도 한쪽을 재면 다른 쪽이 정해진다 — 이게 정말이라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라는 정밀한 반문이었다. 결말이 흥미롭다. 1964년 벨이 이 반문을 실험 가능한 형태로 바꿨고, 실험은 양자역학의 손을 들어줬다.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들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문제를 정확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잘 진 논쟁이 이긴 논쟁만큼 과학을 밀고 간 경우다 — 2022년 노벨물리학상은 그 실험을 한 사람들에게 갔다.

삶이 만든 철학

그는 양자역학의 반대자가 아니라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1921년 노벨상도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양자 연구로 받았다. 문제는 그 이론이 자라서 코펜하겐의 해석 — 측정 전에는 정해진 값이 없고, 확률이 세계의 바닥이라는 — 을 입었을 때였다.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그는 보어를 상대로 사고실험을 하나씩 던졌고, 보어는 하나씩 받아쳤다. 아침에 아인슈타인이 반례를 내놓으면 저녁에 보어가 답을 찾아오는 날들이었다고 참석자들은 회고한다. 1935년의 EPR 논문은 그 논쟁의 정점이다. 그는 끝내 설득되지 않은 채 1955년에 죽었고, 벨의 정리와 이후의 실험들은 그가 지키려던 국소적 실재론 쪽이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기초를 묻는 분야 — 오늘날의 양자정보학까지 — 는 상당 부분 그의 반문들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평생 통일장 이론을 좇으며 프린스턴의 연구실에서 계산하다 죽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확신은 하나였다 — 세계는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세계에 관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세계가 이해된다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그 확신의 요약이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세계는 확률로만 말해질 수 있는가?
  • 달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거기 있는가?
  • 잘 진 논쟁은 이긴 논쟁보다 못한가?
  • 동시에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나 동시인가?
당신이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결론이 있다면 — 그 거부가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이 카드에 나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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