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1841 ~ 1904 · 프라하(체코) — 뉴욕에서 3년을 보내고 돌아온 곳
유럽을 흉내 내지 말고 당신들의 소리를 찾으라
그가 살았던 시대
프라하 근교에서 푸주한 겸 여관집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오랫동안 무명이었고, 프라하의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켜며 생계를 유지했다 —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러 온 바그너를 직접 보기도 했다. 전환점은 브람스였다.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금 심사위원이던 브람스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해 자기 출판업자에게 소개했고, 그렇게 나온 「슬라브 무곡」이 크게 팔리며 단숨에 유럽에 알려졌다.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냈다. 뉴욕 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3년을 지냈으나 향수병에 시달려 계약을 접고 돌아왔다. 기차 구경을 좋아해 역에 나가 기관차 번호를 적어 오는 취미가 있었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미국 음악의 미래는 흑인 영가라 불리는 것 위에 세워져야 한다.」 — 뉴욕 헤럴드 인터뷰, 1893년
유럽에서 온 작곡가가 미국인들에게 유럽을 흉내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고 실제로 논란이 됐다.
그는 말로만 한 것이 아니다. 조수이자 학생이었던 흑인 성악가 해리 벌리에게서 영가를 배웠고, 그것이 「신세계 교향곡」에 들어갔다. 2악장의 잉글리시 호른 선율이 그 결과다. 흥미로운 것은 그 뒤의 일이다 — 그의 제자가 이 선율에 가사를 붙여 「고잉 홈」이라는 노래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방향이 반대다.
이 주장의 뿌리는 그가 체코 사람이라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에서 자기 나라의 소리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삶이 만든 철학
그가 속한 흐름을 「국민악파」라 부른다. 19세기까지 클래식의 중심은 독일과 이탈리아였고, 다른 나라 작곡가들은 그 양식을 배워 따라 썼다. 19세기 후반에 체코, 러시아, 노르웨이, 핀란드, 스페인의 작곡가들이 자기 나라의 민요와 춤과 말의 억양을 곡에 가져오기 시작한다.
이 흐름은 정치와 떼어놓기 어렵다. 대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거나 통일을 앞둔 나라에서 일어났고, 음악이 곧 정체성의 주장이었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러시아 지배 아래에서 금지곡이었다.
드보르자크가 특별한 것은 그 발상을 남의 나라에 건네주었다는 점이다. 자기 민요를 쓰라는 말을 자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 가서 미국인에게도 했다.
「신세계 교향곡」은 1969년 아폴로 11호에 실려 달에 다녀왔다. 암스트롱이 가져간 녹음 중 하나였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을 그리며 쓴 곡이, 인류가 가장 멀리 떠났을 때 함께 갔다.
그가 던진 질문들
- 남의 양식을 잘 따라 하는 것과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은 어디서 갈리는가?
- 자기 나라의 소리라는 것이 정말 있는가?
- 멀리 떠나야만 고향이 보이는가?
남의 양식을 잘 따라 하는 것과 자기 것을 만드는 것 사이에서, 당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이 놓인 물음같은 물음 아래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 3개의 질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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