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1885 ~ 1962 · 코펜하겐(이론물리학 연구소)
물리학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사람
그가 살았던 시대
1920년대의 코펜하겐은 양자역학의 수도였다. 보어의 연구소에는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디랙 같은 이십대들이 드나들었고, 새 이론의 해석 — 수식은 맞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 이 거기서 다듬어졌다. 측정 전의 입자에는 정해진 위치가 없다는 것, 물음을 어떻게 던지느냐가 어떤 답이 가능한지를 정한다는 것. 훗날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게 되는 이 그림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고, 두 사람의 논쟁은 이십 년 넘게 이어졌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양자 세계라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추상적인 양자물리학적 기술뿐이다. 물리학의 과제가 자연이 어떠한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 제자 오게 페테르센이 전한 보어의 말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반실재론 선언이 아니다. 요점은 이렇다 — 우리는 자연을 언어와 실험 장치를 통해서만 만나므로, 물리학의 문장은 "자연이 어떠하다"가 아니라 "이 실험 조건에서 무엇이 관측된다"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말이 이 아틀라스의 「말은 진리를 담을 수 있는가」 물음 옆에 서는 이유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말할 때, 보어는 물리학의 언어에서 같은 벽을 만나고 있었다. 다만 전해진 말이라는 점은 밝혀 둔다 — 보어 자신의 글에는 이 문장이 없고, 제자의 회고로 남았다.
"대립하는 것은 서로를 보완한다(contraria sunt complementa)." — 1947년 덴마크 왕실 훈장을 받으며 직접 고른 문장. 문장 위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 넣었다
빛은 파동처럼 행동할 때가 있고 알갱이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두 그림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쪽만으로는 현상 전체를 말할 수 없다 — 이것이 그의 상보성이다. 어떤 실험을 하느냐에 따라 한 얼굴만 드러나고, 두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실험은 없다.
그가 훈장 문양으로 태극을 고른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동아시아의 음양 — 대립하면서 서로를 이루는 — 에서 자기 개념의 그림을 본 것이다. 다만 이것은 유비이지 계보가 아니다. 상보성은 노자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나왔고, 보어가 나중에 그 닮음을 알아본 것이다.
삶이 만든 철학
1913년 그는 원자 모형으로 이름을 얻었고 1922년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가 물리학사에 남긴 더 큰 것은 연구소와 논쟁이다. 코펜하겐의 그의 연구소는 한 세대의 물리학자들이 거쳐 간 학교였고,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은 그 학교의 교과서였다. 1927년 솔베이에서 시작해 1935년 EPR 논문에 대한 응답으로 이어진 그 공방에서, 그는 상대의 사고실험을 피하지 않고 하나씩 받아 답했다. 1935년의 응답 논문 제목은 아인슈타인 쪽 논문과 글자 하나까지 같다 —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다고 볼 수 있는가」. 같은 물음에 반대의 답을 단 것이다. 전쟁이 오자 그는 나치 치하의 덴마크에서 탈출했고 — 유대계 어머니를 둔 그는 체포 명단에 있었다 — 맨해튼 계획에 관여한 뒤, 전후에는 핵무기의 국제 통제를 주장하며 각국 정부에 공개편지를 썼다. 원자를 연 사람이 그 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끝까지 물은 셈이다. 그의 묘비에는 직함이 없다. 코펜하겐의 가족 묘역에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아니라 그저 닐스 보어로 묻혔다.
그가 던진 질문들
- 물리학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인가, 자연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인가?
- 서로 모순되는 두 그림이 둘 다 필요하다면, 모순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 가능한 답을 정한다면, 물음 이전의 세계는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쓰는 말로는 담을 수 없어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놓인 물음같은 물음 아래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 3개의 질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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