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1770 ~ 1827 · 하일리겐슈타트(빈 근교) — 유서를 쓴 곳
감각을 잃고도 그 감각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
그가 살았던 시대
아버지는 아들을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려 했다. 밤에 술 마시고 돌아와 자던 아이를 깨워 건반 앞에 앉혔다는 기록이 있고, 나이를 두 살 줄여 신동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스물여덟 무렵부터 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해 서른둘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동생들 앞으로 유서를 썼다. 그 뒤 몇 해가 그의 최대 생산기다 — 교향곡 3번부터 8번, 「발트슈타인」과 「열정」 소나타가 이 시기에 나왔다. 말년에는 완전히 듣지 못해 필담으로 대화했고, 그 대화 수첩은 비서 쉰들러가 상당 부분을 위조하고 없앤 것이 뒤에 밝혀졌다. 우리가 아는 베토벤 일화 중 많은 것이 이 사람에게서 나왔고, 그래서 신뢰받지 못한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나는 죽고 싶었다. 오직 예술이 나를 붙잡았다. 내 안에 있다고 느끼는 것을 다 내놓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1802년
음악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서른둘에 동생들 앞으로 이 문서를 썼고, 부치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두었다. 죽은 뒤에 발견됐다.
이 문장에서 그를 붙잡은 것은 희망도 신앙도 아니다. 아직 쓰지 못한 작품이다. 안에 있는 것을 다 꺼내기 전에는 갈 수 없다는 것 — 이것이 그의 남은 25년을 굴린 동력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계속 썼다. 귀가 닫힌 뒤 그는 기억과 계산으로 작곡했다. 글 쓰는 사람이 소리 내어 읽지 않고도 문장의 리듬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대가는 있었다 — 이 시기 그의 성악곡은 부르기가 몹시 어렵다. 사람의 목이 어디까지 버티는지를 귀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이 만든 철학
한국과 일본에서 그를 「악성(樂聖)」이라 부른다. 서양에는 대응하는 호칭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이 붙은 이유는 분명하다 — 그는 음악가의 지위 자체를 바꿨다.
그 전까지 작곡가는 주문받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문 없이 쓰고 완성한 다음 팔았다. 후원자에게 공작은 수천 명이 있지만 베토벤은 하나뿐이라는 취지로 쓴 사람이다. 신분제가 흔들리던 시대에 예술가가 귀족과 대등하다고 주장한 거의 최초의 사례다.
음악 안에서 그가 한 일은 하나로 요약된다. 작은 재료 하나를 끝까지 밀어붙여 큰 구조를 세우는 것. 교향곡 5번의 첫머리는 음 네 개다. 그 짧은 조각 하나가 40분짜리 곡 전체를 만들어낸다. 재료가 적을수록 오히려 멀리 간다는 것을 실물로 보여준 셈이다.
다만 「고난을 뚫고 나온 성인」이라는 서사가 사람을 가린다는 지적도 있다. 그는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하숙집을 수십 번 옮겼으며,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제수와 몇 년을 소송했고 그 조카는 나중에 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던진 질문들
- 감각을 잃고도 그 감각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원래 어디에 있던 것인가?
- 재료가 적을수록 멀리 갈 수 있는가?
- 예술가는 무엇을 근거로 귀족과 대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로 닥쳤을 때, 당신은 무엇을 계속했습니까?
이 사람이 놓인 물음같은 물음 아래 다른 시대의 사상가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 3개의 질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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