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BC 1100년경 성립 추정, 바빌론 신년제에서 낭송 · 바빌론
혼돈에서 질서로 — 세계의 시작을 정치로 노래한 창조 서사시
그가 살았던 시대
함무라비의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수도로 남았다. 매년 봄 신년제(아키투)에서 대사제는 마르두크 신상 앞에서 이 서사시 전체를 낭송했다 — 왕은 그 의례에서 뺨을 맞고 눈물을 흘려야 왕권을 갱신받았다. 우주의 질서와 정치의 질서가 한 편의 시로 묶여 있던 것이다.
그의 말, 그리고 쉬운 해설
"높은 곳의 하늘이 아직 이름 붙지 않았고, 낮은 곳의 땅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에누마 엘리시)..." — 서사시의 첫 행
제목 "에누마 엘리시"가 곧 첫 두 단어("높은 곳에서 ~했을 때")다. 주목할 것 — 태초의 상태를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아직 이름이 없음"으로 그린다는 점. 이름을 붙이는 것이 곧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는 발상이다.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는 이 직관은 훗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로, 그리고 언어가 사유의 한계라는 현대 철학의 질문으로 이어지는 긴 강의 상류다.
삶이 만든 철학
줄거리는 우주적 왕위 쟁탈전이다. 태초의 담수(압수)와 염수(티아마트)가 뒤섞인 혼돈에서 신들이 태어나고, 시끄러운 젊은 신들을 없애려는 티아마트에 맞서 아무도 나서지 못할 때, 젊은 마르두크가 조건을 건다 — 이기면 최고신의 자리를 달라는 것. 그는 폭풍의 그물로 티아마트를 잡아 그 몸을 둘로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들고, 반역한 신의 피로 인간을 빚는다 — 신들의 노동을 대신할 존재로. 창조가 평화로운 말씀이 아니라 전쟁과 시체와 계약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이 시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의 즉위를 정당화하는 정치 문서이기도 하다는 것 — 우주론은 처음부터 권력론과 한 몸이었다. 19세기 니네베 발굴로 점토판이 해독되자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창세기의 혼돈의 물, 하늘과 땅의 분리 모티프가 천 년 먼저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 이야기들이 서로 베끼고 논박하며 자라왔다는 것 — 신화도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발견이었다.
그가 던진 질문들
-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는 일인가?
- 질서는 어떻게 혼돈을 이기는가 — 그 대가는 무엇인가?
- 창조 이야기는 누구의 권력을 정당화하는가?
당신이 이름 붙이지 못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 부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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